충남 서산, 개심사.
벚꽃이 진 뒤 찾아온 절은
소란 대신 깊이를 건넸다.
입구에 서 있는 두 개의 돌비석.
장식도, 이름도 없는 이 돌덩이를
누군가는 ‘문’이라 불렀다.
“이건 여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문입니다.”
그 말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고요가
천천히 내 안의 소리를 지운다.
우린 늘 눈에 보이는 문만 문이라 여긴다.
경첩 없는 문은 없다고 믿고,
틀 없는 길은 헤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긴 다르다.
젖은 돌바닥, 흔들리는 향냄새,
계단 틈에 낀 시간들이 문이 된다.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열리는 곳이다.
계단은 반듯하지 않다.
비틀린 돌과 구부러진 나무뿌리가
자꾸만 발을 붙잡는다.
그 울퉁불퉁함 속에서
오히려 중심을 더 또렷이 찾게 된다.
대웅전 앞에선 누구나 말이 없다.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은 오래 기왓장을 만진다.
모두 각자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기왓장 틈에서 자란 잡초.
아무도 돌보지 않았지만
스스로 뚫고 나왔다.
단단한 것 밑에서도 길은 열린다.
그건, 삶도 마찬가지다.
절 안 어딘가에는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자들이 있겠지.
그들의 눈빛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 맑게 스민다.
나는 그 눈을 보지 못했지만
그 맑음이
문득 내 안에 번졌다.
돌아가는 길.
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가 보인다.
처음엔 꺾인 줄 알았지만,
다시 보니 빛을 향해
방향을 튼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한 줄기가
문을 지나듯 내 안을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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