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이 환호와 축복으로 맞이되듯,
늙음과 죽음 또한 축복이 되기를.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이 문장을 되뇌이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오늘 9순을 맞으신 장모님을 뵈러 요양원에 다녀왔다.
고요한 복도와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 사이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인생이란 긴 드라마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장모님은 한때 눈부신 젊음을 지녔던 분이다.
젊은 시절을 아는 이들의 기억 속에,
그녀는 단연 빛나는 미인이었다.
그 그림자가 이제는 주름진 얼굴 사이로 아련히 남아 있다.
한동안은 세상과의 접점을 서서히 닫아가며
우울한 날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우리의 말에
다시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때문일까,
90이라는 숫자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모님의 눈빛에는 여전히 총기가 서려 있었다.
그 총기만큼이나,
노화가 남긴 통증도 분명했다.
이곳저곳 쑤시고 아픈 몸,
더딘 걸음과 쉽게 지치는 숨결 속에서도
장모님은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계신다.
이제 그분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식들의 따뜻한 전화 한 통,
짧은 면회 한 번이
최고의 기쁨이자 위안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그러나 늙음이 슬픔만으로 채워져야 할 이유는 없다.
세월의 무게가 쌓인 얼굴은 고귀하며,
살아낸 시간만큼 삶의 깊이는 더욱 짙어진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은 누구나 도달해야 할 마지막 여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 여정을 어떻게 준비하느냐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일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남겨진 사람들의 눈물이 있을지라도,
떠나는 이의 삶이 숭고하고 아름다웠다면,
죽음은 슬픔만이 아닌 하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장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삶의 방향을 다시 되짚어본다.
생의 끝에 이르러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들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
전화 한 통, 미소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가
결국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이다.
늙음도,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그 끝은 결코 어둡지 않다.
삶의 시작이 환호였다면,
그 끝은 감사와 평온이어야 한다.
그렇게 늙음도 죽음도
결국 축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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