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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오뚝이는 끝까지 일어서야만 할까

by 선비천사 2025. 6. 9.

 

어릴 적, 오뚝이 장난감을 마주했을 때 나는 조금 슬퍼졌다.
누가 봐도 꿋꿋해 보이는 그 몸짓이, 내 눈엔 왠지 억지스러운 복종처럼 보였다.

 

아무리 밀어도, 아무리 비틀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
그 모습이 도리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왜 꼭 일어나야 하지?’

 

시간이 흘러 나는 반성을 습관처럼 하게 됐다.
실수했을 때만이 아니다.
누군가 기분이 나빠 보이면 내가 뭘 잘못했나 고민하고,
혼자 있는 밤이면 괜히 오늘 하루를 후회하며 마음속 무릎을 꿇었다.

 

그 반성이 나를 성장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나를 잠식해갔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안의 팔과 다리가
녹아내린 것처럼 축 처져 있다는 걸 느꼈다.

 

오뚝이처럼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는 일상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더 ‘일어나는 이유’를 잃어갔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오뚝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예전엔 끈질기다고만 생각했던 그 태도에서
이제는 고통을 외면하는 방식이 보였다.

 

혹시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일어나기 싫다’는 말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은 우리가 다시 일어나길 바라고,
다시 밝아지길 바라고,
다시 힘을 내길 바라지만—

 

가끔은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그냥 좀 쓰러져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묻는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래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위로가 아니라 허락이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오뚝이는 끝내 일어서는 장난감이지만,
인간은 장난감이 아니다.

 

우리는 멈춰도 되고, 넘어져도 되며,
때론 일어날 이유가 생길 때까지
그냥 누워 있어도 된다.

 

중요한 건 ‘일어나는 자세’보다
‘넘어져 있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다.

 

이제 나는 오뚝이에게서
복원력이 아닌 자기 인식을 배운다

 

다시 일어서기 전에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
그 고요한 복구의 순간이야말로
진짜 회복의 시작이라는 걸.

 

그러니 오늘 나에게 말해준다.
“지금, 조금 누워 있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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