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어느 밤이 문득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고요한 시간.
대청마루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마당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끊이지 않았고, 바람이 발목을 간질였다.
세상은 잠든 듯 조용했고, 나는 또박또박 시를 읽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김광섭의 시를 읊조리다 보니, 낯선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퍼졌다.
사춘기였던 나는 그 문장들 안에서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지나가는 것, 남는 것, 그리고 잊히는 것들.
어머니는 방 안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셨고, 나는 마루 끝에서 나직이 시를 읊었다.
아마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방 안에 스며들었을지도.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그 조용한 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 될지.
이제는 마루 대신 책상 앞에 앉는다.
시 대신 수필을 쓰고, 낭독 대신 자판을 두드린다.
하지만 밤의 감성은 여전하다.
창밖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멀리 들려오고,
커피 한 잔 옆에 켜둔 조명만이 방 안을 채운다.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써 글을 썼다.
이제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를 기록하기 위해 쓴다.
단어는 줄어들었지만, 진심은 더 깊어졌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오래된 마음이 담긴다.
인생은 요란한 장면보다
이런 조용한 밤에 더 많이 깃든다.
잊힌 줄 알았던 밤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젊은 날의 내가 밤하늘에 던진 목소리.
그게 돌아와 지금의 글이 되었고,
이 문장이 또 누군가에게 닿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밤, 당신도 조용히 무언가를 읊고 있다면
그 순간이 가장 당신다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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