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던 겨울 저녁이었다.
현관 앞에서 누군가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
초면인 노인이었다.
아무 망설임 없이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아무 일 없던 듯 복도는 조용했다.
누구도 알지 못했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소리 없는 선행이 나를 조용히 위로해주었다.
도시는 흔히 차갑다고들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파트 복도를 지나며 이름을 묻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무심한 도시가 좋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나를 숨 쉬게 한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지 않아도 괜찮고,
누군가에게 내 일상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잘난 척을 해도, 나는 내 속도로 살아간다.
이 무관심은 때때로 존중이 된다.
누구도 내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
누가 뭘 타고, 뭘 입고 다니는지 모른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을 굳이 재지 않는다.
시골은 달랐다.
누가 누구 집에 놀러왔는지,
어느 집 자식이 어디 취직했는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이상한 곳.
겨울이면 김장을 나눠먹고,
여름이면 고구마를 주고받는 따뜻한 공동체.
하지만 그 정겨움은 경계 없는 관심이 되기도 했다.
혼자 밥을 먹으면 걱정을 사고,
좋은 옷을 입으면 눈총을 받는다.
가까움은 친절이기도 했지만,
때론 숨 막히는 간섭이기도 했다.
그 거리 없는 친밀함 속에서,
질투와 소외는 조용히 자랐다.
친하다는 이유로 마음의 선이 자주 무너졌다.
지금 나는 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간다.
누구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나만의 기준으로 정리된 삶.
SNS 아이디 뒤에 숨은 나지만,
그만큼 솔직한 나이기도 하다.
물론 도시의 밤은 외롭다.
혼자 있는 방,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불빛.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난다.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지는 자유.
타인의 관심보다 내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시간.
그건 고독이 아니라, 자립이다.
창밖 아파트 창문마다 불이 켜진다.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하늘 아래 있다.
이토록 조용한 공존이,
가장 인간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익명의 도시에서
조용하고 단단한 평온을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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