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불덩어리 같았다.
햇살은 매정했고, 땀은 등줄기를 따라 끝없이 흘렀다.
그 무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열망이든, 청춘이든, 혹은 사라져가는 시간이든.
그렇게 한 계절을 건너오니,
어느새 가을이 조용히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가을은 묘하다.
봄처럼 들뜨지도 않고, 여름처럼 타오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겨울처럼 무겁게 내려앉지도 않는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불현듯 가슴에 작은 떨림을 심어준다.
이마의 주름을 어루만지며,
가을은 속삭인다.
“이제는 덜어낼 때다.”
나는 가볍게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아도 좋았다.
풍경을 보려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려는 여행이었으니까.
버스 창밖으로는
아직 여물어가는 들녘이 흘러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벼 이삭,
연두빛을 조금씩 잃어가는 산자락.
잠시 정류장에서 내려 작은 국숫집에 들렀다.
나이 지긋한 주인장이 삶은 면을 툭툭 건네며 말했다.
“올해는 비가 많아 벼가 잘 될지 모르겠어요.”
그 말 한마디에,
내 안에 묵혀 있던 근심이 겹쳐졌다.
삶이란 결국 날씨처럼
내 뜻대로 흘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국숫발을 삼키며 새삼 받아들였다.
걸음을 옮기자,
바람에 밀려 낙엽 몇 장이 발치에 와닿았다.
아직 이르지만,
떨어져 나온 잎들은 벌써 제 몫을 다한 듯 담담했다.
문득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다.
미웠던 이도, 그리운 이도.
그러나 그 이름들을 오래 붙들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관계가
나를 빚어낸 결실이 되었다는 사실만 남았으니까.
여행의 설렘은 예전보다 줄었고,
감각도 무뎌졌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더 고마웠다.
무뎌진 감각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지나간 계절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계절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길 끝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가을 햇살이 벤치에 내려앉고,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올가을에도 다시 길을 나선다.
'감성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엔 커피 한 잔, 그리움이 향기로 번지다 (126) | 2025.09.02 |
---|---|
로봇이 다 해주는 세상, 사람은 무엇을 남길까 (108) | 2025.08.31 |
김치는 익는다, 마음도 그렇다 (101) | 2025.08.27 |
깍두기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77) | 2025.08.26 |
"라면 한 그릇에 담긴 인생, 그리고 나만의 끓이는 방식" (111) | 202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