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였다.
햇살이 처마 끝을 타고 대청마루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햇살을 등에 지고 누워,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깍둑, 깍둑…”
칼이 도마를 치는 소리.
무가 썰려 나가는 소리.
그건 단순한 부엌의 소리가 아니라,
내 유년을 통과해온 어떤 음악이었다.
느긋하고, 단정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어머니의 하루.
깍두기를 담그는 그 소리가 마치 마음을 절여 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무를 한결같은 크기로 썬다.
고춧가루, 마늘, 새우젓을 정성껏 넣고
무를 버무릴 때의 손길은
단순한 요리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키우고, 달래는 모습 같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내 인생을 떠올렸다.
나는 깍두기를 좋아한다.
새콤한 기운과
아삭한 식감.
뜨거운 설렁탕에 그 하나만 얹어 먹어도
온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깍두기가 맛있으면 국물도 믿을 수 있다.
깍두기 하나에
그 집의 성실함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깍두기 같은 사람이다.
항상 곁에 있지만, 중심은 아니다.
모임에서도 나서는 법이 없고
중요한 순간에 발언권을 갖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누구의 곁에 앉아주는 사람.
말없이 들어주고, 조용히 웃어주는 사람.
그래서 이상하게도,
늘 누군가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
한 번은 친구가 말했다.
“너랑 있으면 편해.
말 안 해도 다 알아주는 느낌이랄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게 좋은 건지,
외로운 건지 모르겠던 시절도 있었다.
왜 나는 언제나 깍두기일까.
왜 나는 ‘곁다리’일까.
세상은 늘 배추김치를 주인공 삼는다.
묵직하고, 확실하고, 존재감이 뚜렷한 것.
깍두기는 그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채운다.
국물 옆, 고기 옆, 탕 옆.
메인이 아닌 존재로서.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삼겹살을 구워 먹다
배추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말한다.
“야, 깍두기라도 줘봐.”
그때 깍두기는 주인공이 된다.
필요한 순간,
조연은 주연보다 더 주연이 된다.
작지만 묵직한 맛.
그걸 아는 사람만이
깍두기의 가치를 안다.
학교 회식 자리에서
나는 여전히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
대화의 중심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와서 말한다.
“너 옆이 제일 편해.”
그 한 마디가 오래 남는다.
그건 조연의 외로움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품격이었다.
깍두기의 삶은 단단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라지면 허전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입에 닿으면 확실하다.
어쩌면 세상은
깍두기 같은 이들로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자리를 채우고,
빈틈을 막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
나는 그런 인생이 좋다.
박수 받지 않아도,
누군가의 식사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
조연이지만, 빠지면 안 되는 인생.
깍두기 같은 내 삶도,
누군가에게는 깊은 맛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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