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내내
배롱나무는 스스로의 껍질을 모두 벗어던졌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맨몸으로
긴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모두가 그늘을 찾아 숨는 한여름.
달아오른 몸통 가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생명이 차오른다.
붉은 꽃송이가
툭, 툭, 터진다.
그늘 하나 내어주지 못하는 짧은 가지 끝.
배롱나무는 대신
꽃을 내어준다.
누군가 이 뜨거운 여름을 건너기를 바라는 듯,
붉은 입술 같은 꽃을
하늘로 조용히 밀어 올린다.
지친 하늘마저 숨을 고르는 오후.
쉬어 가던 매미 울음은
길가에 떨어진 붉은 꽃잎 위에서
잠시 여름을 내려놓는다.
배롱나무는 안다.
가장 뜨거운 계절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야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폭염의 한복판에서도
묵묵히 붉은 꽃을 피운다.
오늘도 배롱나무는
상처를 꽃으로 바꾸는 법을
조용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작품 해설
배롱나무는 봄에 스스로 껍질을 벗고, 가장 뜨거운 여름에 붉은 꽃을 피운다. 이 시는 그 생태적 특징을 인간의 삶과 연결한다.
고통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과정이다. 그리고 충분히 견딘 시간은 결국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배롱나무는 그늘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꽃으로 여름을 위로한다. 그래서 이 시의 붉은 꽃은 희망이며, 인내이며, 다시 살아가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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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 나무는 안다
가장 뜨거운 계절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야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멋진 구절이네요. 선생님 시로 배롱나무가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
배롱나무는 봄부터 나무의 묵은 껍질을 벗고 알몸으로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는군요. 그리고 뜨거운 여름에 가장 뜨거운 입김이듯 붉은 생명의 꽃을 터트리고요. 그 꽃 순차적으로 피어 백일을 간다하고요.
목백일홍이 많은 일부 남녘에서는 그 뜨거운 백일 동안의 개화가 벼가 피어 익어 가는 시기와 같다하여 ‘쌀꽃’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요. 그 뜨거움으로 익은 벼는 사람에게 양식을 주고, 배롱나무 꽃은 사람의 뜨거운 정열, 단심의 혼이 되는군요.
글읽는 선비나 구도를 향해 정진하는 스님들이 그 뜻을 흠모하여 선비들의 정원이나, 수도승 많은 도량 정원에는 배롱나무가 많다하구요.
저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 피우는 정열과 핀 꽃 백일 가는 변치 않음이 사랑과 닮아 사랑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출처 : 계간 2008 겨울호
해저에 뿌리를 두고 곧게 서서는 수면에 머리 들고 온갖 바람과 파도, 해일이 덮쳐 와도 끄덕하지 않은 섬과 같은 날 선 사랑, 낭만적이고 멋지네요.
울림님, 이렇게 깊고 정성스러운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배롱나무를 바라보며 담고 싶었던 마음보다 더 깊은 곳까지 헤아려 주신 듯하여, 오히려 제 시를 제가 다시 읽고 배우게 됩니다.
특히 남녘에서 배롱나무꽃을 ‘쌀꽃’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참 인상 깊습니다. 가장 뜨거운 시절에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와, 같은 햇볕 아래 여물어 사람의 양식이 되는 벼를 함께 생각하니 여름의 뜨거움에도 저마다의 결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비의 정원과 사찰에 배롱나무가 많은 까닭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뜨거움을 피하지 않고 꽃으로 견디는 모습, 오래도록 붉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지조와 단심, 정진의 마음을 보았겠지요.
복효근 시인의 「섬의 동사형」까지 떠올려 주신 것도 반갑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깊이 뿌리내린 섬의 사랑과, 한여름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래 꽃피우는 배롱나무의 마음이 어딘가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순간보다, 비바람과 뜨거운 계절을 지나면서도 마음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 그래서 배롱나무의 백일 붉음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한 편의 시에 또 다른 시와 이야기, 그리고 삶의 의미를 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림님 덕분에 제 배롱나무에도 가지 하나가 더 뻗고, 그 끝에 새로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난 기분입니다.
귀한 감상 오래 마음에 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