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삶, 족쇄를 푸는 순간 비로소 삶이 흐른다 | 고등학교 교사의 은퇴 수필

삼십이 년 동안 나는 고등학교 사회교사였다.

교단에 서서 역사를 이야기했고, 민주주의를 설명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시민의 자세를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도 늘 같았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 말은 학생들을 위한 조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으며 살았다.

새벽이면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했다. 빈 교실의 창문을 열고 칠판을 닦았다. 시험문제를 만들고, 수행평가를 채점하고, 생활기록부를 쓰다 보면 계절이 바뀌곤 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쉬면 뒤처질 것 같았고, 멈추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삼십이 년이 흘렀다.

정년퇴직을 앞둔 마지막 수업.

평소와 다르지 않게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마쳤다.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갔다.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누군가 조용히 남긴 그 한마디가 빈 교실에 오래 머물렀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교탁 앞에 서 있었다.

칠판에는 방금 지운 분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수없이 많은 수업이 시작되고 끝났던 공간.

내 청춘도 그 칠판 앞에서 함께 흘러갔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

교실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익숙했던 나 자신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퇴직 후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출근 준비를 하려다 멈추고,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 이어졌다.

세상은 변함없이 움직였다.

학생들은 새로운 선생님과 수업을 시작했고,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허전했다.

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자리는 생각보다 금세 채워졌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한 문장을 만났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마.”

처음에는 그 말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그 말을 마음속에 품고 지내자 조금씩 다른 의미가 보였다.

그 말은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일이 아니라, 늘 더 잘해야 한다고 다그치던 마음이었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족쇄는 학교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 후 나는 자주 소래산을 걷는다.

예전에는 정상까지 걸린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길가에 핀 들꽃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을 바라본다.

정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이제는 서둘러 오를 이유가 없다.

산은 정상보다 걸어가는 시간 속에 더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늦게 배웠다.

해 질 무렵이면 베란다에 서서 노을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렸다.

이제는 붉게 물드는 하늘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달라진 것은 풍경이 아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다.

퇴직 후 삶은 끝이 아니었다.

속도를 늦추며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성실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몰아세우는 성실이 아니라, 오늘을 아끼는 성실을 선택하려 한다.

새벽이면 아직도 가장 먼저 눈이 뜬다.

그러나 더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먼저 들어온다.

나는 그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서 있는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단단히 채워 두었던 족쇄를 풀고 나서야 알았다.

삶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지금 내 곁을 스쳐 가는 시간을 놓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내 삶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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