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맡기는 남자|책임과 일탈 사이에서 찾은 삶의 균형

현실과 일탈의 경계에 선 중년 남자

나는 웬만한 결정을 남에게 맡긴다.

여행지는 아내가 정하고, 식당은 먼저 배고프다고 말한 사람이 고른다. 회사에서는 일정표가 나를 끌고 다닌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라면서 대본과 연출, 조명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긴 배우처럼 산다.

편하기는 하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오지만, 맡기면 불평만 하면 된다. 인간은 책임보다 불평을 훨씬 능숙하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탈출 경보가 울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차를 타고 싶다. 목적지도 없이 내려, 모르는 골목을 걷고 싶다. 내 이름과 역할을 잠깐 벗어 두고 나 하나로 숨 쉬고 싶다. 족쇄를 풀어야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는 삶을 떠올리면 가슴속 바람이 조금 세진다.

하지만 일탈은 늘 현관에서 붙잡힌다.

“어디 가?”

아내의 짧은 질문 하나면 거대한 탈출 계획이 동네 산책으로 축소된다. 가방 대신 휴대전화를 챙기고, 자유 대신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간다. 나의 반란은 대개 분리수거장에서 끝난다.

우습지만 그것도 삶이다. 가족은 나를 묶는 끈인 동시에 길을 잃지 않게 붙잡는 손이다. 혼자이고 싶다가도 빈집에 들어서면 괜히 텔레비전부터 켠다. 그냥 곁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가족의 위로는 떠나고 싶은 순간보다 돌아왔을 때 더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내게 안정감이 있다고 말한다. 내 속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지는데, 겉모습만 보고 평화로운 공화국이라 착각한다. 말이 적은 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조용한 것은 아니다.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 뿐, 안에서는 늘 회의가 열리고 있다.

나는 선을 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선이 왜 필요한지 안다. 책임을 모두 버리면 자유가 올 것 같지만, 자유도 오래 혼자 두면 외로움이 된다. 반대로 책임만 붙들면 삶은 숨 막히는 의무가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탈출이 아니라 작은 틈인지 모른다. 혼자 커피를 마시는 한 시간, 목적 없이 걷는 골목, 방문을 닫고 음악 한 곡을 끝까지 듣는 일. 인생을 뒤엎지 않고도 나를 되찾는 방법은 의외로 소박하다.

퇴근길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경계를 지나고 있다.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집에서 멀어지고 있다. 나도 불안과 평온 사이에서 오늘의 자리를 찾는다. 걱정을 줄이고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시간은 멀리 달아나는 데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맡긴다. 아내는 오늘도 무엇을 먹을지 묻고, 나는 습관처럼 “당신이 정해”라고 말한다.

그러다 잠시 생각을 바꾼다.

“오늘은 내가 정할게.”

겨우 저녁 메뉴 하나다. 그래도 내 삶의 운전대를 조금 되찾은 기분이다. 큰 일탈은 아니지만, 삶은 이런 작은 선택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맡기며 산다. 다만 내 마음까지 맡기지는 않으려 한다. 책임과 자유 사이에서 비틀거리더라도, 그 균형만큼은 내가 잡아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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