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하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의 결

바람의 결을 짚다

 

8월 하순, 새벽 베란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의 소리가 달라졌다.

매미 울음은 여전히 아파트 단지 사이를 메우고 있고, 한낮의 햇볕도 뜨겁다. 그런데 새벽 공기에는 한여름과 다른 서늘함이 섞여 있다.

얇은 옷을 어깨에 걸치고 창밖을 바라본다. 소래산 초입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나무들은 아직 짙은 초록이다. 가을이라 부를 만한 빛깔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바람은 달라졌다.

계절은 눈보다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여름이 조금씩 물러나는 기척은 바람 속에 먼저 묻어난다.

예전의 나는 이런 변화를 잘 알아채지 못했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오면 해야 할 일부터 생각했다. 달력의 빈칸보다 채워야 할 일정이 먼저 보였다. 아침에는 하루를 서둘러 시작했고, 저녁에는 다음 날을 걱정했다.

몇 해 전 늦은 퇴근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낮 동안 달궈진 보도블록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뜻밖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함께 나오던 사람이 말했다.

“이제 저녁 바람이 다르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를 놓치지 않는 일이 그날의 바람보다 중요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계절을 놓친 것이 아니었다.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을 지나치며 살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계절은 달력처럼 정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8월 31일까지 여름이었다가 9월 1일부터 갑자기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벽 공기가 조금 서늘해지고, 해가 기우는 시간이 조금 빨라진다. 같은 바람인데도 어느 날 문득 피부에 닿는 느낌이 달라진다.

오늘 아침 소래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나무는 여전히 푸르렀고 매미는 요란하게 울었다. 햇볕이 드는 곳에서는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런데 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땀이 전보다 빨리 식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여름이 아주 조금 물러서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는 책장을 정리하다 빛바랜 노란 스프링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한때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두던 노트였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시간도 어쩌면 사람 안에 쌓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래전 내가 쓴 문장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적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시간에 대해 이런 문장을 써놓고도 늘 시간에 쫓겼다.

조금 우스웠다.

노트를 책상 위에 놓고 우엉차 한 잔을 우렸다. 예전 같으면 뜨거울 때 몇 모금 마시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날은 차가 조금 식을 때까지 잔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매미가 울었다. 선풍기는 느리게 돌아갔고, 열린 창문으로 이따금 바람이 들어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깝지 않았다.

오늘 산책길에서는 감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무성한 잎 사이에 아직 푸른 감 몇 알이 매달려 있었다. 잎과 비슷한 빛깔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만했다.

나는 잠시 감나무 앞에 섰다.

아직 익지 않은 감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남은 여름 햇볕을 더 받고, 비를 맞고, 바람을 지나 제 시간을 채워갈 것이다.

해 질 무렵 다시 베란다에 섰다.

한낮의 열기는 아직 콘크리트 벽에 남아 있었고, 멀리서는 매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8월은 분명 여름이었다.

그런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는 아침의 서늘함이 다시 묻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다. 전에는 지나쳤던 바람 앞에서 잠시 멈추고, 차가 식는 것을 기다리고, 푸른 감 몇 알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을 뿐이다.

밤이 깊으면 노란 노트를 다시 펼쳐볼 생각이다.

오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조금 달랐다는 것.

아직 여름인데, 여름만은 아닌 것 같았다는 것.

그것부터 적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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