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는 자기 성찰 수필

나는 누구인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젊은 내가 그 안에 서 있었다. 머리는 검고 어깨는 반듯했다. 무엇보다 눈빛이 지금과 달랐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면서도, 세상에는 반드시 정답이 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수십 년 뒤 자신이 어떤 얼굴로 이 사진을 바라보게 될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저 사람을 다 알지 못한다. 분명 내가 살아낸 시간인데도 그때 무엇을 그토록 원했고 무엇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희미한 것들이 많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낯설 수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서늘했다.

나는 누구인가.

오래전 시험장에서 받아 들었던 빈 답안지가 떠올랐다. 답을 몰라 연필 끝만 바라보던 순간처럼,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아직도 쉽게 한 줄을 쓰지 못한다.

이름을 적을 수는 있다. 나이와 직업, 살아온 곳과 해온 일도 적을 수 있다. 누구의 자식이었고 누구의 가족이며 누구와 인연을 맺고 살아왔는지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적은 뒤에도 마지막 한 칸은 비어 있다.

정작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젊었을 때는 그 답을 밖에서 찾았다.

남보다 조금 앞서면 잘 사는 줄 알았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지면 행복해질 줄 알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내 삶도 그만큼 값진 것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앞을 보면서도 자꾸 옆을 살폈다. 누가 나보다 먼저 가는지,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를 확인했다.

내 답안지를 앞에 놓고 남의 답을 훔쳐보며 살아온 셈이다.

이상하게도 하나를 이루면 마음은 잠시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부족한 것이 보였고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행복은 늘 다음에 있었다.

조금만 더.

이것만 이루면.

여기까지만 가면.

그렇게 ‘다음’을 향해 가는 동안 많은 ‘오늘’이 지나갔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애써 얻었던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이름조차 희미해졌는데,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순간들은 뜻밖에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함께 밥을 먹던 얼굴.
아무 일 없느냐고 묻던 목소리.
내 말을 재촉하지 않고 들어주던 사람.
별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저녁.

그때는 몰랐다. 평범해서 기억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실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고 이제야 삶의 정답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를 때가 많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소한 말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고, 용서했다고 믿었던 일을 다시 꺼내 아파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했던 날이 있는가 하면 내 상처에 갇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용감한 나와 비겁한 나, 너그러운 나와 옹졸한 나를 한 사람 안에서 수없이 만났다.

예전에는 그중 좋은 것만 골라 나라고 믿고 싶었다.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지우고 싶은 문장도 내 것이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문장도 내 것이다. 틀린 답이라고 힘껏 줄을 그어버린 시간까지도 이미 내가 살아낸 생의 한 부분이다.

어쩌면 내가 평생 풀어온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였는지도 모른다.

두 질문은 닮았지만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이 지나온 나를 돌아보게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아직 쓰지 않은 칸을 바라보게 한다.

나는 다시 사진을 집어 든다.

사진 속 젊은 사람에게 지금의 내가 정답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가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는 그때의 답을 쓰며 여기까지 왔고, 나는 그 답 위에 수없이 고치고 덧쓰며 오늘에 도착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칸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제 남의 답을 기웃거리지 않으려 한다.

잘못 쓰면 지울 것이고, 지워지지 않으면 흔적으로 남겨둘 것이다. 어떤 날에는 한 줄을 가득 쓰고,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까지 내 삶일 것이다.

사진을 서랍 속에 다시 넣으려다 잠시 멈춘다.

그리고 사진 뒤의 빈 여백에 오늘 날짜를 적는다.

무엇인가 한마디 더 쓰려다가 그만둔다.

아직은 쓰지 않기로 한다.

답은 종이 위에 적는 것이 아니라, 남은 날들로 써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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