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 탈곡되는 음성들

오늘은 처서(處暑)다.
베란다 창을 여니 후텁지근한 공기가 먼저 밀려든다. 볕은 여전히 따갑고 이마에는 금세 땀이 밴다. 처서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그런데 한여름과는 무언가 다르다. 해가 기우는 시간이 빨라졌고, 저녁이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결도 달라졌다. 뜨거운 공기 속에 아주 엷은 서늘함이 섞여 있다.
처서는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절기로, 입추와 백로 사이에 든다. ‘처서(處暑)’는 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처서가 왔다고 하루아침에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기는 계절을 칼로 자르듯 나누는 경계선이 아니라 자연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시간의 표지에 가깝다.
그래서 처서에는 여름과 가을이 함께 산다.
창밖에서는 아직 매미가 울고 밤이면 모기도 날아든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옛말은 처서 무렵 날씨가 차츰 선선해지면서 모기의 기세도 한풀 꺾인다는 뜻이다.
주방에 물을 올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모니터에는 어젯밤 쓰다 만 글이 그대로 떠 있다. 한 문장이라도 더 보태야 생각이 깊어질 것 같아 수식어를 붙이고 말을 늘여놓은 흔적이 가득하다.
아침 볕 아래에서 다시 읽으니 하고 싶은 말보다 잘 쓰고 싶었던 마음이 먼저 보인다.
한 문장을 지운다.
또 한 문장을 지운다.
화면에 빈자리가 생긴다.
처서 무렵 농촌의 곡식도 결실을 향해 간다. 벼의 생육과 수확 시기는 지역과 품종,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벼는 생육 후반으로 갈수록 낟알을 채워가고 농부는 다가올 수확을 준비한다.
곡식이 여문다는 것은 무작정 커지는 일이 아니다. 한때 잎과 줄기로 향하던 힘이 열매와 씨앗을 채우는 쪽으로 옮겨간다.
그 모습을 생각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나는 오랫동안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칠판 앞에 서면 말이 많았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젊은 날에는 더 배우고, 더 인정받고, 내가 무엇을 아는지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힘껏 밖으로 뻗어야 하는 계절도 필요하다.
나에게도 그런 여름이 길었다.
은퇴한 뒤에는 칠판이 모니터로 바뀌었다. 분필 대신 자판을 두드렸지만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도 자꾸 말을 보탰다. 문장이 많아지면 생각도 깊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오늘 ‘탈곡’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탈곡은 수확한 곡식에서 낟알을 떨어내는 일이다. 농부는 볏단을 그대로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 거두어들인 뒤에는 알곡을 가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장도 그렇지 않을까.
삶도 그렇지 않을까.
살아온 모든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끝까지 들고 갈 수도 없다.
칠판 앞에서 크게 말하던 목소리도 내 것이었고, 은퇴 뒤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닿고 싶어 했던 마음도 내 것이다.
이제는 그것들을 버리기보다 가려보고 싶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했던 말과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려고 쌓았던 것과 끝내 남겨야 할 것.
곡식은 탈곡을 거친 뒤 알곡의 무게를 드러낸다.
사람의 말도 비슷할 것이다.
말이 많아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알게 될 때 비로소 깊어진다.
처서의 의미도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
처서는 여름이 완전히 끝난 날이 아니다. 여름 속에서 이미 시작된 가을의 방향을 알아차리는 절기다.
삶의 변화도 그렇게 오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제와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다른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예전에는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를 생각했다.
이제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한다.
차를 우려 책상으로 가져온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매미가 운다.
나는 모니터에 남은 문장을 다시 읽는다.
아직 말하고 싶고, 아직 쓰고 싶다. 다만 모든 말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책상 위 종이 한 장을 살짝 들어 올린다.
나는 문장 하나를 더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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