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실의 낮은 서랍장 위
황동빛 추 하나가 흔들린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같은 길을
같은 속도로
같은 거리만큼.
방 안의 공기는
그 포물선을 따라
조용히 갈라진다.
TV 화면이 번쩍일 때마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되돌아온다.
늘 같은 자리로.
째깍.
소리는 짧고
방은 잠깐 숨을 멈춘다.
욕실 타일 위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떨어져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조금씩 가져가는 장치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정전된 밤.
숫자가 사라진 벽에서
비로소 들린다.
쿵.
쿵.
어둠 속에서
내 심장이
조용히 시간을 세고 있다.
기계가 멈추자
다른 시계가 시작된다.
오전 4시 14분.
추는 여전히 흔들리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잠깐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무언가가 줄어드는 것인지.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시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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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휴지 수집 창고에서 마주한 시간과 실존의 철학 — 삶의 허무를 응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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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벽 시계와 마주하면서 닳아가는 나를 인식하는 시간이 되었군요. 이 시를 읽으며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존재의 주체는 나이지만 나는 유한적인 존재인 고로 시간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의 시작점인 듯합니다. 시계를 처음 누가 발명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시계는 단지 지금 시간을 인간에게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기계이지요. 시계바늘은 늘 지금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의 사유를 따라가 보면 무의미 하듯 좌우를 찰칵이며 반복하는 시계의 추가 아침을 민들고 점심과 저녁을 만들고 낮과 밤을 만들고 계절도 만들고 지난 해와 새 해의 구분도 만들더니 급기야는 내 생을 조금씩 가져 가기도 하는 것이 되기도 하니 말이지요. 그러니 찰카이며 좌우를 반복하는 시계는 단지 현재 시간을 알려 주는 무의미한 찰칵임이 아니라 세상에 나를 있게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조금씩 가져가 닳게하여 궁극에는 나를 사라지게도 하는 거로군요. 결국 시계는 무의미한 추의 좌우반복과 숫자판을 반복 회전하는 바늘을 가지고 시나브로 나에게서 생을 앗아가고 삼라만상을 변화하게 하는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군요. 시계가 존재를 닳게하여 변화 시킨다는 이 사유에 종결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지금 벽의 시계와 마주한 이 시간은 이미 어제의 나가 아니고, 또 내일의 나가 아닐 것이며 지난 해의 나가 아니고 내년의 나가 아닐 것이니 시계가 만들어 가는 무의미한 듯 반복되는 일상이 사실은 유의미한 일상을 만들고 끝내 한 생애를 완성지을 것이니 다만 이 시간 나는 행복한가와 더 행복을 향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할 듯하네요
감사합니다, 울림 님.
댓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제가 시를 쓰며 막연하게 느끼고만 있었던 생각들을 차분하게 풀어 주신 것 같아 오히려 제가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말씀처럼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알려 주는 기계일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제게는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을 조금씩 지나가게 하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시간이 흐른다’는 익숙한 표현보다, ‘어쩌면 내가 시간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울림 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리고 더 행복을 향해 가고 있는가’ 라는 문장은 제게 또 하나의 답처럼 다가왔습니다. 결국 시계는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그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내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지요.
제 시를 이렇게 깊이 읽어 주시고, 새로운 의미를 더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 역시 제 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