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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감성시8

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 봄 하늘을 훔쳐간 구름이어디선가 조리개를 열었다.높새바람 따라물줄기들이 사뿐히 쏟아진다. 삭정이 틈 사이,겨울을 견딘 껍질이 슬며시 벌어지고그 아래서 작은 신음이 움튼다. 풀빛 자벌레는몸을 말고 있던 꿈을 펴며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하늘은그 긴 사연들을이 봄비에 실어 보내는 걸까. 계산되지 않은 계절의 방문,갑작스러운 빗속에서나는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 묻는다.왜 하필 지금내 마음을 건드리는 건지. 아아—오늘은,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2025. 5. 15.
“사랑은 새벽에 피는 꽃씨였다” 당신은 내게 믿음을 주었어요.말 없이, 조용히, 그러나 깊이.무너지는 하루들 사이에서당신은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죠. 삶의 고통이 조용히 스며들던 새벽,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내 이름을 조심스레 부르며 다가왔어요.마치, 아직 별이 가시지 않은 하늘에누군가 몰래 불을 켜놓은 듯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나는 당신이 무서웠어요.언제든 나를 지나칠 사람일까 봐.고요함 속에서 스러질 그림자일까 봐.그래서 더, 한 발짝 물러나 당신을 바라봤죠.숨죽인 채, 조용히. 그러다 문득,아주 평범한 날의 꿈속에서스쳐 지나던 장면 하나가내 마음을 툭 건드렸어요. 그건 아마,내 안에 오래도록 눌려 있던 당신의 흔적.그리움도, 설렘도 아닌말하지 못했던 말 한마디였을 거예요. 새벽 안개 너머당신의 목소리가 들렸고,귀밑 머리.. 2025. 5. 5.
“실잠자리와 은빛 물고기 이야기” 물가에 조용히 앉는다.억새 사이를 비집고 낚싯대를 툭 펴본다. 들판엔 새싹이 자라고,멀리 펼쳐진 풍경은 꼭 유화 그림 같다.하늘은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듯,호수는 그걸 그대로 받아 안는다. 구름은 양떼 같고,오리떼도 유유히 떠다닌다.혹시 저 구름 속에 물고기라도 숨어 있나?혼자 피식 웃으며 상상해본다. 나는 찌 하나를 호수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 살짝 띄운다.찌를 중심으로하늘도 흐르고, 호수도 흐른다. 실잠자리 한 마리,찌 위에 조심스레 내려앉는다.모든 게 잠시 멈춘 듯 고요하다. 그러다 〈툭!〉 찌가 흔들린다.줄이 팽팽해지고, 고요가 찢어진다. 펄떡!은빛 물고기 하나가 물 위로 솟구친다. 낚시란,그 한순간을 기다리는 일이다. *관련글 보기https://sunbicheonsa.com/25 봄은 노랗게.. 2025. 4. 30.
봄은 노랗게 투정부리며 온다 쳇, 쳇, 쳇—일꾼들의 손놀림은왜 이리 더딘지,햇살에 눈꺼풀이 간질간질하품처럼 스르르 열리다그만 먼저 나와버렸지. 조금 이른 걸까.바람은 자꾸 치마를 들추고,노란 가방에 노란 옷,병아리 같은 아이들이재잘재잘 몰려온다.뭐가 그리 신나는 걸까. 쳇, 쳇, 쳇—화장품 냄새가 자꾸 코를 찌르고땅벌도, 나비도 보이질 않네.목련 그늘진 울타리 아래,우리는 서로 기대어먼저 주둥이가 터졌어 쳇, 쳇, 쳇—봄날 오후,삐죽삐죽노랗게 피어나는개나리의 작은 투정들. *관련글 보기https://sunbicheonsa.com/62 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봄 하늘을 훔쳐간 구름이어디선가 조리개를 열었다.높새바람 따라물줄기들이 사뿐히 쏟아진다. 삭정이 틈 사이,겨울을 견딘 껍질이 슬며시 벌어지고그 아래서 작은 신음이 움튼다. .. 2025. 4. 20.
방아쇠를 당긴 건 나였다 아침이었다.산 너머 햇살이 눈을 찌른다.나는 반사적으로숨을 크게 들이쉰다.‘찰칵.’속에서 뭔가정확하게 준비됐다. 누구도 나를 겨눈 적 없다.나는내가 갈 방향을 스스로 정했고,방아쇠를 당긴 것도나였다. 그 순간부터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한 알의 총알처럼. 표정 없이감정 없이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앞만 보고 달린다. 흙먼지 날리는 마당을 지나물안개 낀 강가를 건너고답답한 공기처럼 무거운사람들의 말과 시선을 통과한다. 길은 명확하지 않다.표지판도 없다.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내가 향하고 싶은 곳이 있었고,그게 있다는 걸나는 믿었다. 산을 넘고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끝끝내,작은 언덕 하나.모든 소음이 멎는 곳. 거기까지나는 가고 싶었다. 달리면서 생각은 스친다.두려움도, 후회도머릿속에 총알처럼 튄다.하지만 어.. 2025. 4. 20.
호미로 밭을 매던 어머니, 우리 마음속을 여전히 일구시네 – 어떤 생의 흔적에 바칩니다 어머니가 꽃상여를 타셨다.벚꽃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나비들은 아지랑이 사이로 꽃과 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상여소리가 구성지게 울리고,자식들이 여비를 새끼줄에 끼워 넣자꽃상여는 꿈결처럼 흔들리며 북망산으로 향했다.상여꾼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어깨에 메고,힘든 줄도 모르고 소리꾼의 가락을 따라가며 후렴을 되뇌었다. 오늘은 동네잔치 같았다.상여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뒤따라오는 동네 개들,잡은 돼지는 튼실한 놈으로,부침개와 전도 풍성히 마련했다. 이날만큼은모두가 어머니를 기억했다.살아생전 그렇게 힘들게 하시던 아버지도붉어진 눈으로 조용히 상여 뒤를 따르셨다. 저승은 말이 없다.이승에서 할 수 있는 일은그저 미지근한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는 것뿐.사람들은 이 .. 2025.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