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지고, 사랑은 남았다|사랑의 타이밍을 놓친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길에서 손을 잡고 걷는 연인의 뒷모습

올해도 벚꽃은 어김없이 피었다. 봄이 왔다는 소식보다 먼저, 골목과 산책로를 연분홍빛으로 밝혀 놓았다. 벚꽃은 예고장을 보내지 않는다. 피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면 이미 절정이고, 다음 주에 보자고 미루면 바닥에서 기다린다.

나는 그 꽃길을 당신과 걷고 싶었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꽃잎이 머리 위에 내려앉으면 서로 늙었다고 놀리고 싶었다. 거창한 여행도 아니었다. 운동화 한 켤레와 비어 있는 오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일수록 자꾸 뒤로 밀렸다. 오늘은 바빴고, 내일은 피곤할 예정이었다. 벚꽃은 내 사정을 알 리 없는데 나는 꽃이 내 일정표를 봐줄 것처럼 굴었다. 봄비와 벚꽃 사이에서 다시 사랑을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생각은 자주 행동보다 한 걸음 늦었다.

“주말에 가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주말은 약속을 미루기에 참 편리한 말이다. 오기도 전에 믿음을 주고, 막상 오면 다른 핑계를 데려온다. 당신은 알겠다고 했다. 서운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며칠 뒤 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아침에 나가 보니 나무 아래가 꽃잎으로 환했다. 벚꽃은 나무에서 졌지만 땅 위에 마지막 봄을 펼쳐 놓고 있었다.

꽃잎은 질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가지에서 조용히 손을 놓고,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 사람의 마음도 때로 그렇다. 크게 다투지 않아도 멀어지고, 작별을 말하지 않아도 한 걸음씩 물러난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함께 걷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삼키다가 어느 날부터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서운함은 화를 내는 대신 체념을 배운다. 나는 침묵을 평온으로 오해했고, 당신의 배려를 당연함으로 받아들였다.

벚꽃이 진 길을 혼자 걸었다. 며칠 전까지 사람들이 사진을 찍던 자리에는 젖은 꽃잎만 붙어 있었다. 화려했던 봄은 흔적이 되었고, 약속은 뒤늦은 후회가 되었다. 그제야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지 생각했다. 대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과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이 남았다.

사랑은 큰 사건으로만 무너지지 않는다. 작은 약속을 자꾸 미루고, 익숙한 얼굴을 대충 바라보고, 고맙다는 말을 내일로 넘길 때 조금씩 빛을 잃는다. 반대로 사랑을 지키는 일도 대단하지 않다. 밥을 먹었는지 묻고, 걸음을 맞추고, 지금 피어 있는 꽃을 함께 보는 일이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영원은 언제나 오늘의 얼굴로 찾아온다. 오늘 건네지 않은 마음을 내일의 내가 대신 전해주지는 못한다. 꽃은 기다려주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도 저마다 피고 지는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난봄을 붙들고 후회만 할 수는 없다. 꽃이 졌다고 나무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빈 가지 안에서는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일이 이미 시작된다. 사랑도 진심으로 돌아보는 순간, 아주 작게 다시 움틀 수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당신에게 말했다.

“꽃은 졌지만, 우리 걸을까?”

당신은 잠시 나를 보더니 운동화를 신었다. 말보다 먼저 현관문을 열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늘 곁에 있던 사람의 자리를 뒤늦게 알아보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의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한 걸음 내딛을 시간은 남아 있었다.

꽃이 없는 길을 함께 걸었다. 나무는 푸른 잎을 내밀고 있었고, 바닥의 꽃잎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벚꽃 구경은 놓쳤지만 우리는 서로의 걸음은 놓치지 않았다. 꽃보다 늦은 산책이었으나, 마음에는 늦지 않은 산책이었다.

내년 봄에도 벚꽃은 필 것이다. 그러나 내년의 꽃은 내년의 꽃이다. 오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오늘의 마음을 전하는 일은 다음 계절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벚꽃은 지고 사랑은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은 저절로 남은 것이 아니다. 늦게라도 손을 내밀고 함께 걸었기에 남았다. 당신 곁에 아직 한 걸음의 자리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기다리고 있는가.

브런치에서 선비천사의 다른 수필도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