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침 8시 12분. 나는 출근 시간의 마지막 3분을 부여잡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숨은 차고 넥타이는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직장인의 아침은 늘 무언가에게 쫓긴다. 버스에 쫓기고, 시계에 쫓기고, 아직 만나지도 않은 팀장의 눈빛에 미리 쫓긴다.
그녀가 먼저 타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와 회색 스커트. 특별할 것 없는 차림이었다. 그런데 머리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값비싸 보이지도 않았다. 그날 아침 햇살이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문이 닫혔다. 4층에서 11층까지, 고작 몇 초짜리 동행이 시작되었다.
“예쁘네요.”
말은 입술 앞까지 왔다가 뒤로 물러났다. 평생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해본 적이 없었다. 괜한 오해를 사면 어쩌나. 뜬금없는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한마디를 끝내 말하지 못하는 선택과 망설임이 몇 초 사이에 머릿속을 세 바퀴나 돌았다.
나는 평소 정면만 보는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층수 표시등을 보고, 회의에서는 서류를 보고, 식당에서는 밥그릇을 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거나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내 생활 규칙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내 안의 모범생이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머리핀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내가 말했다. 정말 말해버렸다.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벼락도 치지 않았고 비상벨도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금 교무실에서 사고를 친 학생처럼 괜히 층수 표시등만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11층에 도착하자 그녀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회사도 아니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우리는 말 한마디를 가운데 두고 각자의 하루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하루가 조금 달라졌다. 점심밥은 평소보다 맛있었고 팀장의 잔소리도 빗소리 정도로 들렸다. 퇴근길에는 단골 빵집에 들러 크림이 가득 든 소보로빵을 샀다. 이런 날은 좀 달아도 된다고, 누구의 허락도 없이 결정했다.
말은 칼이 되기도 하고 햇살이 되기도 한다. 말의 상처와 침묵의 자유를 생각하면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다치게 하는 말이 있다고 해서 따뜻한 말까지 삼킬 필요는 없다. 칼을 내려놓은 입술은 작은 등불 하나쯤 켤 수 있다.
그녀의 아침도 썩 좋지 않았다고 상상해본다. 우유병을 떨어뜨렸거나 다림질이 덜 된 블라우스가 마음에 걸렸을지 모른다. 머리핀은 오래전 친구에게 받은 것이었고, 꾸밀 마음도 없이 서둘러 꽂았을 것이다.
그때 낯선 남자가 머리핀을 칭찬했다. 능숙한 말투도 아니고 준비한 문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진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녀 역시 오후의 꾸중을 조금 가볍게 넘기고, 길을 걷다가 문득 웃었을지 모른다.
머리핀 하나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던 작은 정성을 누군가 발견했다는 사실. 사람은 거창한 칭찬보다 그런 사소한 발견에 더 오래 따뜻해진다.
나는 그날 밤 거울을 보며 혼잣말했다.
“야, 너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구나.”
이것이 나의 소심한 일탈이었다. 회사 돈을 들고 달아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사표를 던진 것도 아니다. 침묵이라는 오래된 생활 규칙을 단 한 문장만큼 어겼을 뿐이다.
일탈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늘 먹던 메뉴 대신 처음 보는 음식을 고르는 일, 먼저 안부를 묻는 일, 퇴근길에 잠시 공원을 걷는 일도 작은 반란이다. 일에 묶인 사람이 쉼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처럼, 사소한 이탈은 메마른 일상에 숨구멍을 낸다.
우리는 무례할까 봐 친절을 미루고, 쑥스러워서 고마움을 감춘다. 마음은 따뜻한데 입은 자꾸 겨울이 된다. 그렇게 말하지 못한 칭찬이 얼마나 많이 하루 속에서 사라졌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바꾼 하루 에세이의 결론은 소박하다. 진심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상대를 소유하려는 말이 아니라 존재를 알아봐 주는 말이면 충분하다. “잘 어울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 짧은 문장들이 사람의 어깨를 잠시 가볍게 한다.
세상은 거대한 구호로만 바뀌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의 몇 초, 낯선 사람의 서툰 칭찬, 작게 번지는 미소로도 조금 따뜻해진다.
그날 나는 정면만 보며 살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돌려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반란이라면, 세상에는 이런 소심한 반란이 조금 더 많아져도 좋겠다.
오늘 당신의 눈에 들어온 작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마음속에서만 맴돌게 둘 것인가, 따뜻한 한마디로 세상에 건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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