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끝에 불어온 바람|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공동 현관문을 밀고 나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은 거대한 한증막이었다.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아스팔트가 이글거렸고, 상가의 에어컨 실외기들은 뜨거운 숨을 쉬지 않고 토해냈다.

그늘에 들어가도 시원하지 않았다. 그늘마저 더위를 먹은 듯했다.

이런 날이면 여름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더웠고, 해가 져도 더웠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밤들이 내게도 있었다.

오랫동안 서 있던 자리를 내려온 뒤, 하루가 갑자기 넓어졌다. 넓어진 시간만큼 고요도 깊어졌다.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글을 쓰다가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환하던 화면이 순식간에 검어졌다.

그 검은 화면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내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래 들여다보면 낯선 사람 같았다.

창밖으로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누구의 하루가 끝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불이 꺼질 때마다 세상에서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는 날도 있었다. 애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날은 더 길었다.

그럴 때는 내일이 오늘의 복사본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침은 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습관처럼 공동 현관문을 열었다가 잠시 멈춰 섰다.

바람 때문이었다.

며칠 전과 같은 문이었다. 같은 계단을 내려왔고, 같은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공기가 달랐다.

콧등을 스치는 바람 끝에 아주 희미한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며칠 전 입추가 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달력을 믿지 않았다. 폭염 한가운데서 가을이라는 말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달력보다 먼저 알고 있던 것이 있었다.

바람이었다.

집 근처 소래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 전까지 숲을 차지하고 있던 매미 소리가 한결 낮아져 있었다. 그 큰 소리가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전에도 울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매미가 너무 크게 울어서 내가 듣지 못했을 뿐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도 조금 비스듬해졌다. 풀잎 끝에는 작은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건으로 목덜미를 연신 훔치던 사람들도 오늘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무는 그대로였고 길도 그대로였다. 여름도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바라보니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여름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덥다고 투덜거리며 땀을 닦는 동안에도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 계절은 제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밤에도 무언가는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래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변화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을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아침 볼을 스친 바람은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이미 바뀌고 있었다는 뒤늦은 증거였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오래전 검은 모니터 속에서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어디선가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풀벌레 소리가 오솔길에 낮게 번졌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그리고 한동안 서서 바람을 맞았다.

아직 여름이었다.

그런데 바람 끝에는 이미 다른 계절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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