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권태 속에서 발견한 평온한 일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낡은 달력이 벽에 걸려 있다.

한 장 뜯어내면 그만인데 그것조차 귀찮다. 날짜는 이미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달력만 며칠 전을 붙들고 있다.

그냥 두기로 한다.

오늘은 나도 조금 늦게 가고 싶다.

마당에서 호미질 소리가 난다.

툭. 툭.

아내가 채송화를 옮겨 심고 있다.

몇 해 전 시장에서 작은 포트 몇 개를 사 온 뒤로 봄이면 비슷한 일을 한다. 풀을 뽑고, 흙을 뒤집고, 채송화를 심는다.

꽃은 해마다 비슷한 자리에 핀다.

나는 그것을 매년 보면서도 언제 피었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휴대폰을 집어 든다.

화면을 위로 몇 번 밀어 올린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났고, 누군가는 새 일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이루었다.

손가락 하나로 다른 사람의 하루가 끝없이 지나간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나.

대답할 만한 것이 없다.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잠시 뒤 화면이 까맣게 꺼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지루함은 게으름 같았고, 권태는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하루가 비어 있으면 무엇이라도 집어넣어야 마음이 놓였다.

책 몇 장이라도 읽어야 했다.

글 몇 줄이라도 써야 했다.

산책이라도 해야 했다.

하루를 그냥 보내는 일에는 이상하게 죄책감이 따랐다.

마당으로 나간다.

아내가 채송화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호미로 흙을 조금 파고 작은 포트를 기울인다. 뿌리 주변의 흙이 부서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받쳐 든다.

손톱 밑이 까맣다.

나는 옆에 서서 한동안 구경한다.

“그거 매년 심어야 해?”

내가 묻는다.

아내는 고개도 들지 않는다.

“심어야 피지.”

그 말이 우습게도 들리고 당연하게도 들린다.

“언제 피는데?”

그제야 아내가 나를 한번 올려다본다.

“때 되면 피겠지.”

다시 흙을 덮는다.

나는 더 묻지 않는다.

채송화에는 아직 꽃이 없다.

낮은 줄기와 작은 잎뿐이다.

아내는 꽃이 없는 화분 앞에서 한참 흙을 만진다. 물을 조금 붓고 다른 포트를 집어 든다.

기다리는 사람의 손은 생각보다 바쁘다.

방으로 돌아온다.

벽에는 여전히 지난 날짜가 걸려 있다.

문득 내가 지루함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뒤처지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 했다.

그런데 삶에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날들을 떠올려 보면 그날들은 하나같이 지루하지 않았다.

마감이 코앞에 닥쳤던 날.

통장 잔고를 몇 번씩 확인했던 밤.

몸 어딘가가 평소와 다르게 아파 인터넷에서 같은 증상을 찾아보던 새벽.

전화 한 통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오후.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였다.

그토록 바라던 하루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권태라고 부르고 있었다.

창문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온다.

창틀 그림자가 거실 장판 위에 길게 누워 있다.

장판 한쪽에는 오래전에 생긴 긁힌 자국이 있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흠집이다.

그림자가 그 위를 아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은 가고 있다.

싱크대에는 점심때 먹은 그릇이 남아 있다.

수도꼭지를 틀고 그릇을 씻는다. 물에 잠긴 사기그릇이 손끝에 차갑다.

접시 두 장.

국그릇 두 개.

숟가락 두 벌.

평생 몇 번이나 이런 그릇을 씻었을까.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셀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밥을 먹고 그릇을 씻는 일.

아침에 창문을 여는 일.

마른 화분에 물을 주는 일.

저녁이면 현관에서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이는 일.

너무 자주 반복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들.

나는 오랫동안 특별한 날들이 삶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특별한 날은 몇 장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아무 일도 없었던 날들이다.

베란다 밖으로 소래산이 보인다.

해가 능선 쪽으로 기울고 있다.

오늘 노을은 별로 붉지 않다.

하늘이 조금 밝다가 조금 어두워진다.

그뿐이다.

마당에서 호미 소리가 멎는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린다.

아내가 들어온다.

슬리퍼를 벗어놓고 손을 턴다. 바지 무릎에 흙이 묻어 있다.

“다 심었어?”

내가 묻는다.

“응.”

“잘 피겠지?”

아내가 나를 본다.

아까 내가 물었던 말을 기억한 모양이다.

피식 웃는다.

“때 되면 피겠지.”

아내는 세면대로 간다.

수도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벽을 본다.

낡은 달력이 아직 그대로다.

아침에는 저 달력이 게으름의 흔적처럼 보였다.

지금은 그냥 며칠 늦은 달력으로 보인다.

내일 뜯어도 된다.

모레 뜯어도 된다.

어쩌면 아내가 먼저 뜯을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방 안이 어두워진다.

나는 한동안 불을 켜지 않는다.

오늘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별것 없다.

아내가 채송화를 심는 것을 보았다.

그릇을 씻었다.

소래산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면 됐다.

창문을 연다.

서늘한 밤공기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마당 어딘가에는 오늘 옮겨 심은 채송화가 어둠 속에 있을 것이다.

아직 꽃은 없다.

나는 그 꽃이 언제 피는지 확인하지 않기로 한다.

때가 되면 피겠지.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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