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발엔 늘 검정 고무신이 끼워져 있었다.
비 오면 물이 고이고,
더운 날엔 땀이 배어 미끄러지던 신발.
뒤축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걷다 보면 자꾸만 벗겨져
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새 고무신을 사주셨다.
말은 없었고, 표정도 무덤덤했지만
그날 밤 나는
검정 고무신을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건 나에겐 작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에 신고 간 첫날,
신발장 앞에 벗어둔 고무신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라져 있었다.
나는 복도 끝까지 울면서 돌아다녔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또 다른 새 고무신을 내밀었다.
말없이, 조용히.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고무신을 가져간 아이는 누구였을까.
그 아이도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던 걸까.
혹은,
아무도 그 아이에게 신을 사주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 뒤로,
나는 신발을 바꿔가며 자랐다.
운동화, 구두, 부츠까지.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늘 남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이상한 꿈을 꾼다.
어딘가에서 신발을 잃어버리고,
맨발로 거리를 헤매는 꿈.
누군가 내 신발을 신고 달아나는 뒷모습을
붙잡지도 못한 채 바라보는 나.
지금 아이들은
운동화를 교실 밖에 벗어두고도 걱정이 없다.
나는 문득, 이상한 감정이 든다.
좋은 시대가 된 걸까.
아니면,
서로가 그리워할 만한 것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누군가의 신발을 훔쳐가던 그 시절엔
가난했지만, 간절했다.
이젠 모두가 가진 시대지만,
정말 아무도
무엇 하나 절실히 훔치려 하지 않는 세상.
그게 진짜 나아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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