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어딘가로부터 도망친다.
현실의 무게에 눌리고, 생각의 속도에 지치며,
가끔은 멈추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간신히 들고 산다.
그런데 문제는 뭘 버려야 할지는 알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날 아침, 나는 정해진 계획 없이 차에 올랐다.
목적지도 이유도 없이, 그냥 어디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초록이었다.
숨 쉴 틈 하나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
어딘가 나를 기다리는 초록으로 향했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
처음엔 회색 건물들이 이어졌지만,
조금씩 논과 밭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에서
초록이 천천히 퍼져나왔다.
그 초록이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는 듯했다.
‘잘 오고 있다.’
그 말이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망월리 들판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연초록 볏잎들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초록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수천 개의 손이 인사하는 듯했고,
나는 조용히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초록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눈을 쉬게 하고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어떤 깊은 언어 같았다.
말없이 들판을 걷는 동안
머릿속에 켜켜이 쌓였던 피로가 빠져나갔다.
누구에게도 보일 필요 없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되는 공간.
초록은 그런 허락을 주었다.
근처 카페에 들러 시원한 차를 마셨다.
창밖의 들판은 여전히 고요했고,
햇살은 풍경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장면이었지만
이상하게 깊고,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마음속 어지러움이 녹아내렸다.
그건 잊고 있던 내 시간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외갓집 마당에서 맨발로 뛰놀던 여름날.
흙냄새, 풀잎의 감촉,
할머니의 따뜻한 손.
그 시절의 초록과 지금의 초록이
어딘가 닮아 있었다.
그때도 나는 위로받고 있었던 걸까.
다만 몰랐을 뿐.
돌아오는 길, 창문을 열었다.
들판의 바람이 스쳐 가고
초록 냄새가 옷깃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울컥했다.
버티고 있다고 믿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실조차, 초록이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초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잡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있었고,
그 존재만으로 나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은
이런 색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초록이 있어야 한다.
풍경이든,
기억이든,
어떤 사람의 눈빛이든.
그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지치고 무너질 날이 오더라도,
초록은 또 그 자리에
조용히 있을 것이다.
말없이 다가와
바람처럼 속삭일 것이다.
“괜찮아.
오늘도 충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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