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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내 꿈은 아직 칠판에 쓰여 있어요」

by 선비천사 2025. 8. 2.

 

나는 오래된 칠판이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 1학년 교실 맨 앞, 창가 쪽 벽에 기대어 있다.
2001년 봄, 처음 설치되었을 때만 해도 내 몸은 새까맣고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은 분필가루에 물든 옅은 초록빛.
모서리에는 누군가 자석으로 긁은 흠집이 남아 있다.

 

아침마다 문이 열리면,
학생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교실로 들어온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몰래 보며 자리로 가고,
누군가는 “야, 오늘 수행이야?”라며 다급하게 속삭인다.
나는 늘 그 자리에 서서, 그 하루를 조용히 담아낸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칠판이 아니다.
나는 기억의 벽이다.
수학 공식을 적던 분필,
국어 수업에서 읊던 시 한 구절,
때로는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고백이 적히는 공간.
지워진 것 같지만, 손끝의 흔적은 내 안에 고스란히 남는다.

 

몇 해 전 겨울,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아이가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썼다.

 

“오늘은 엄마 기일이에요. 근데 아무도 몰라요.”

 

순간, 교실은 정적에 잠겼고
선생님은 말없이 다가와 자신의 목도리를 그 아이 어깨에 걸어주었다.
나는 그날, 분필이 지식뿐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시간은 흐른다.
고등학생이 되면 바빠진다.
학원, 수행평가, 친구와의 거리, SNS 속 감정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매일 다른 얼굴을 마주한다.

 

같은 교실, 같은 분필, 같은 책상.
하지만 꿈은 전부 다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들은 어디에 그 마음을 적었을까.
태블릿 화면은 반짝거리지만,
분필가루처럼 날리는 감정은 잡아두지 못한다.

 

며칠 전, 졸업을 앞둔 한 아이가 조용히 다가왔다.
“선생님, 저 이 칠판 좋아했어요.”
그리고 구석에 작게 적었다.

 

“내 꿈은 아직 칠판에 쓰여 있어요.”

 

나는 칠판이었다.
누군가의 서툰 시작을 매일 받아 적고,
지워지고, 다시 쓰이고, 또 지워지는 반복 속에서
묵묵히 아이들의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제 내 몸은 낡았고,
언젠가 스마트보드로 바뀔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기술도 내 안의 기억만큼은 지울 수 없다.

 

지워진 줄 알았던 이야기들은
오늘도, 분필처럼 내게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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