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배달되었다.
택배 상자 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난초 하나.
친구가 등단을 축하하며 보내온 선물이었다.
별 기대 없이 박스를 열었지만,
그 순간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보랏빛 꽃망울이 맺혀 있는 낯선 난.
이름은 ‘산천보세란’이라고 했다.
잎은 넓고 두툼했고,
줄기에는 아직 피지 않은 꽃송이들이 조심스레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사람 같았다.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감정,
표현되지 않은 마음이 꼭 저럴까.
그 화분 앞에서 괜히 마음이 잔잔해졌다.
마치 오래된 침묵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꽃은 피지도 못하고 시들기 시작했다.
줄기 끝의 망울들이 고개를 떨구었고,
향기도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허둥지둥 물을 주고 위치를 바꿔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주방 가위를 들었다.
고개 숙인 꽃대를 잘라내며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했다.
화원에 들러 물었더니,
이 난초는 매우 예민한 식물이라 했다.
습도, 온도, 바람, 햇살까지 모두가 중요하단다.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나도 그와 비슷한 존재 아닐까.
말 한마디에 오래 흔들리고,
작은 온기에 깊이 반응하는 마음.
평소엔 둔감한 척 하지만
사실은 쉽게 시드는 마음.
그날 밤, 짧은 꿈을 꾸었다.
시들어가던 꽃이 다시 피어나는 모습.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꽃망울 하나를 끝내 터뜨리는 장면.
깨어난 후에도 그 이미지가 오래 남았다.
꽃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난다는 건 정말 무엇일까.
다음날 아침, 화분을 다시 들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창가에 놓았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이번엔 네 방식대로 해보자.”
꽃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잎 사이로 아주 미세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한 기척이,
어쩐지 작은 용서 같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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