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강은 조용히 흐른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물결 위로, 어느새 낯익은 이름들이 떠오른다.
김우중, 박항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조용히 건너온 수많은 한국의 발자국들.
하지만 그 강의 바닥 깊은 곳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오래된 상처 하나가 가라앉아 있다.
월남전.
1964년, 한국은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남짓.
희망조차 사치 같던 시절,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피로 외화를 번다."
젊은이들은 총을 메고 전쟁터로 향했다.
전투병, 기술자, 의료인력.
그들은 먼 타국에서 피를 흘렸고,
땀을 흘렸고, 때로는 침묵만 안고 돌아왔다.
그 전쟁은 한국에게도, 베트남에게도 잊기 힘든 상흔을 남겼다.
한쪽은 절박함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침입과 상실의 기억으로.
하지만 상처는 머물지 않았다.
월남전 참전은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다.
전쟁을 통해 들어온 외화는 포항제철을 일으켰고,
경부고속도로를 뚫었으며,
훗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그 전쟁은
한국에게는 가난을 벗는 뼈아픈 문턱이었고,
베트남에게는 낯선 나라의 발소리였다.
시간은 그 위에 조금씩 덮개를 만들었다.
1990년대, 김우중 회장이 다시 베트남 땅을 밟았다.
그는 투자자였지만, 그 손에는 무언의 사과와 책임이 실려 있었다.
그가 세운 공장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라
상처 위에 자란 신뢰의 싹이었다.
무심히도, 또 하나의 이름이 불렸다.
박항서.
총 대신 휘슬을 들고 베트남에 온 그는
경기장 위에서 꿈과 희망을 심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박항서를 통해
“한국은 변할 수 있고, 다가올 수 있는 나라”라는 감정을 품게 되었다.
붉은 거리마다 터져 나오는 환호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 베트남에서 한국은 단지 외국이 아니다.
‘우리가 닮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이재용의 삼성은 베트남 최대의 고용 기업이 되었고,
정몽구의 현대자동차는 기술을 함께 나눴다.
수많은 한국 기업들은
K-푸드, K-뷰티, K-패션을 통해 문화의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변화는,
베트남 청년들의 눈빛 속에 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한국처럼 성장하고 싶다.”
“한국처럼 되고 싶다.”
한국어를 배우고,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한국이라는 거울 속에서 그려본다.
우리는 한때 총을 겨눈 나라였고,
이제는 손을 내민 나라가 되었다.
그 강은 여전히 흐른다.
하지만 이제 그 물결은,
과거를 안고 흐르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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