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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체벌, 그 불편한 진실

by 선비천사 2025. 7. 5.

– 한 시대, 한 교육자의 회고록

 

 

1960년대 중반, 나는 여덟 살의 꼬마였다.
머리엔 부스럼이 앉았고, 오른쪽 가슴엔 어머니가 꿰매주신 손수건이 달려 있었다.

 

흐르는 콧물을 닦으라고 달아주신 것이었지만,
그 천 조각엔 어머니의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도 큰 사랑이었다.

 

학교 칠판 위엔 늘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열매는 달다.’
그러나 현실 속 인내는 쓰기만 했다.
그 끝엔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구단을 틀리면 머리를 맞았고,
애국가 가사를 헷갈려도 등짝을 맞았다.
출석부는 너덜너덜했고,
이유는 간단했다.
학생들의 정수리를 내려치느라 닳아버렸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체벌은 더 조직적이었다.
‘지도부’라는 완장을 찬 선배들이 있었고,
복도 끝마다 울먹이는 숨소리가 맴돌았다.

 

고등학교에서는 시험을 보고 틀린 문제 수만큼 매를 맞았다.
부모님들은 학교에 찾아와 금일봉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 좀더 혼내주세요. 사람 만들어주세요.”

 

그 시절 전체가 ‘매의 시대’였다.
매는 교육이었고, 지도였고, 질서였다.

 

대학에 들어가자 체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학군단 훈련을 받기 위해 군사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다시 욕설과 구타가 일상처럼 돌아왔다.

 

군대는 더했다.
누구보다 큰 목소리와 무서운 손이 권력이었다.
말보단 주먹이 먼저였다.

 

그리고 제대 후, 나는 교단에 섰다.
이제는 ‘매를 드는 쪽’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야간 자율학습을 운영하던 시절.
학생들이 도망치지 않게 하려면,
회초리밖에 답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매를 드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다독이고 싶었고,
때리기보다는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당시 학교 분위기 속에서 체벌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면,
‘무능한 교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학급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시선,
학생들에게 만만하게 보인다는 오해,

 

심지어 동료 교사들의 불신까지 감당해야 했다.
결국 나도 매를 들 수밖에 없었다.
교육이 아니라 체벌이 능력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방망이와 마대자루를 든 교사들 틈에서
그저 질서를 지키려 애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이었는지,
아니면 ‘두려움의 통제’였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그때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그 말 한마디가,
내 손에 쥐어진 회초리를 마음속에서 내려놓게 했다.
매는 가르침이 아니라 상처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지금 교사들은 많이 지쳐 있다.
학생과 학부모의 민원, 끊임없는 감시.
명예퇴직을 고민하거나 이직을 꿈꾸는 이들도 있다.

 

한때는 “왜 선생님이 매를 안 드세요?”라던 부모들이,
이제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라고 묻는다.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교실에 선다.
아이들의 눈은 여전히 맑다.
매는 내려놓았지만, 마음은 함께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안다.
사람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닌 공감이라는 것을.

 

그 시절, 우리는 매 아래서 자랐지만
이제는 그 매를 내려놓은 손으로
아이들의 등을 조용히 토닥인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나는 회초리가 아닌 마음으로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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