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지 앉은 지면 위
‘15도’라는 빳빳한 감옥이 기울어 굳어 있다
치켜든 가슴
들려 올린 몸의 수치들
그것은 찬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에 찍힌 낙인이었다
우리는 낱장의 생을 도려내
그릇 위에 올려 채점하던 공범들
터질 듯한 단추의 팽창 뒤로
접혀 있던 고독의 행간
아무도 읽지 않았다
내 손등 위로 검은 별이 돋는다
한때 선망하던 별자리와는 다른
소멸의 습기를 머금은 광휘
푸석한 종이의 질감이
마른 살결의 서사와 닮아 있다
중력은 정직하여
풀 먹인 각도를 낮은 곳으로 부른다
오만이 꺾인 자리마다
눈가의 주름이 골짜기를 내고
신이 빚은 곡선보다
삶이 깎아낸 주름이 더 단단하다
15도의 계절은 지났다
지워진 행간 사이
혼자 단추를 채우던 이들의 비애가
늦게야 흐른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0도의 시선
치켜 올릴 것도
과시할 것도 없이
평평한 손바닥으로 세상을 쓸어보면
흩어졌던 몸들이 맞물려
거대한 숲의 정적으로 돌아온다
더는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나를 몰아붙이지도 않는 자리
느슨해진 등 위로
가장 낮은 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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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시를 표현이 참신하다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15도, 0도 등 구체적 수치로 제시한 표현에 쉽게 공감이 갔구요. 차이에서 오는 비교와 평가를 떨쳐 내려는 의지가 이 시의 출발인 듯하군요. 15도의 기울어진 세상이 가져온 차이와 불평등을 넘어 차이와 평가가 없는 ㅇ도의 숲으로 나아가려는 의지 말이지요. 시 때문에 차이, 불평등은 왜 생겼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에서는 인간이 금기인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선악을 구분하게 된 후, 선하고 악한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게 된 듯한데요. 제가 생각하는 차이는 지구의 축이 기울어져 있어서 계절도, 기온의 차이도 기후의 변화도 생기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기후의 변화가 생기니 다른 환경도 생겼구요. 그러니 생존을 위하여 그 환경에 적응하려는 동물들의 차이도 생겼구요. 그렇게 보면 그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인데, 그 다름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려는 인간도 있었겠구요. 예를 들면 넙치과의 광어, 가재미는 생존을 위해 모래 바닦에 숨기에 알맞게 진화한 것이 납짝한 몸일거고 그 결과 눈도 입도 귀도 한쪽면으로 쏠려 있게 되었을 터인데, 그것을 와 이리 못생겼냐? 왜 눈은 쏠려 있고 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이지요.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인류의 시작은 아프리카가 맞을 것이고 아프리카에서 대륙을 건너 이동해 가면서 북으로 멀리 갈수록 기후에 적합하게 피부색은 점점 흰색으로 변하여 환경에 적응하였을 것인데, 그들의 문화만으로 백인은 멋지고 옳으며 흑인은 추하고 그르다 식으로 사람들의 평가가 따랐을 거로 보이네요.미에 대한 평가도 젊은이들의 팽팽한 15도의 과시는 그냥 젊었을 한 때의 신체적 특징인 것이고 젊음이 가신 중장년들의 쭈글한 0도의 민밋하고 평평함은 그냥 젊음이 지났을 때의 모습인 것인데, 15도의 젊음은 늘 옳다는 인식과 평가가 생겨나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15도를 향힌 경쟁 대열에 나서는 현상이 되어 누구나 없이 긴 시간 화장대 앞에 앉게 하지 않았나 싶군요. 차이와 평가를 내려 놓을 나이, 0도의 숲에서 평가의 시선이 사라진 평화로운 시간 서로 존중하며 각자의 행복 추구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최고일. 것인데….좋은 시는 긴 댓글을 쓰게하네요. 감사합니다.
울림님, 정성 어린 문장들로 시의 행간을 가득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시 속의 ‘15도’와 ‘0도’라는 설익은 비유를 이토록 방대하고 깊은 사유로 확장해 읽어주시다니, 시인으로서 큰 경탄과 기쁨을 느낍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구의 축이 기울어져 계절이 생기고 생명이 다양해졌듯, 인간의 차이 또한 생존과 적응의 아름다운 결과물일 뿐이지요. 넙치의 쏠린 눈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선택이었음에도 그것을 ‘못생김’으로 규정해버리는 인간의 오만한 시선이,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15도의 감옥’에 가두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음의 팽팽함만이 정답이라 믿으며 평생을 화장대 앞과 경쟁의 대열에서 서성이던 우리에게, 울림님께서 짚어주신 ‘다름에 대한 긍정’은 제가 말하고자 했던 ‘0도의 평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늙어가는 주름이 굴욕이 아닌 삶이 정직하게 깎아낸 단단한 곡선임을 알아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독자를 만난 덕분에 제 시가 비로소 숲의 정적 속에서 안식을 찾은 기분입니다. 차이와 평가를 내려놓은 그 평화로운 숲에서, 울림님과 함께 각자의 행복을 존중하며 나란히 걷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귀한 걸음과 깊은 울림을 주는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