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흔적으로 남는다|나이가 들수록 깨닫는 인간관계의 의미

인연은 흔적으로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바탕을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문득 돌아보면 내 마음의 지층에는 세월이 남긴 희미한 자국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며 흐려졌고, 어떤 것은 문지를수록 더 선명해졌다.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 인연이었다.

사람은 기억보다 흔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모든 만남의 시작은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다.

낯선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이 우연히 맞물리는 순간, 우리는 삶이라는 황량한 캔버스 위에 새로운 색 하나가 더해지는 기쁨을 경험한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설렘보다 정직하다.

달콤한 기대가 걷히면 성격이 보이고, 습관이 보이고, 끝내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드러난다.

사랑은 서로를 닮아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견디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다.

결혼은 가장 긴 수행이다.

서로 다른 오랜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같은 식탁을 마주한다는 것은 매일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려 애쓰는 일이다.

얼마 전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식은 저녁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만 움직였다. 젊은 날 같았으면 끝까지 내 옳음을 증명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가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대신 상처를 주고받았던 침묵은 오래 남는다.

갈등을 줄이기 위해 나를 조금씩 접어 두는 날이 많아질수록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관계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관계를 위해 나를 조금씩 지워가고 있는 것일까.

친구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같은 골목을 뛰어다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을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

직업이 달라지고, 살아온 환경이 달라지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도 달라진다.

오랜만에 만난 삼십 년 지기 친구는 웃으며 자식 이야기를 했고, 집값 이야기를 했고, 노후를 이야기했다.

나도 함께 웃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자꾸만 대화의 주파수를 잃어갔다.

빈 찻잔만 천천히 만지작거리던 그 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함께한 세월은 그대로인데, 함께 바라보는 방향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생략하기 쉽다.

그래서 오래된 사람의 무심한 한마디는 낯선 사람의 무례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돌아보면 세상의 어떤 인연도 영원히 무해할 수는 없었다.

가족도 그랬고,

친구도 그랬고,

사랑했던 사람도 그랬다.

심지어 아무런 계산 없이 사랑만 건네주던 반려동물조차도 결국은 상실이라는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상처의 깊이는 결국 그 관계에 쏟아부었던 진심의 깊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후회하면서도 사랑했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무엇이든 붙잡으려 하던 손을 조금씩 비우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예전에는 가까울수록 좋은 관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오래가는 관계는 가까움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너무 가까우면 서로를 소모하고,

너무 멀어지면 서로를 잊는다.

사람 사이에도 숨 쉴 여백은 필요하다.

그 여백이 관계를 오래 살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

상처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이별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사람을 믿는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지나온 모든 인연 가운데 누군가는 내 삶의 가장 어두웠던 계절을 함께 건너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따뜻했던 순간 하나가 상처의 시간을 오래 견디게 만든다.

돌아보면 상처를 준 것도 인연이었다.

하지만 상처 난 자리에 새살을 돋게 해 준 것 역시 또 다른 인연이었다.

인연은 끝나도 흔적은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기억보다 흔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 위를 걸으며 조금씩 성숙해지고, 조금씩 늙어간다.

어쩌면 삶이란 수많은 인연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인연들이 남긴 흔적을 품고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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