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을 씹는 시간

학창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국어 시간이었다고 선뜻 대답하기에는 왠지 쑥스럽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어린 날은 국어 시간의 냄새와 낭독 소리로 가득했다.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는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그런데 국어책의 문장들은 달랐다. 읽는 족족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칠판을 가득 채우던 설명을 한 글자라도 놓칠까 봐 교과서 여백마다 빽빽하게 받아 적었다.
교탁 앞에서는 자주 나를 일으켜 세워 글을 읽게 하셨다.
“철호야, 80쪽 글 한번 읽어봐라.”
교과서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교실의 나직한 소음이 어느새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쉼표에서는 숨을 고르고, 마침표에서는 목소리를 천천히 내려앉혔다.
낭독이 끝나면 선생님은 늘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주셨다.
그 짧은 한마디는 어린 마음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시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시험 때문에 시를 외웠다.
하지만 내게 시는 외우는 것이 아니었다.
입안에서 천천히 굴려 보는 알사탕 같았다.
몇 번 낮게 읊조리다 보면 시의 문장들은 스스로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번 시 외워서 읊어볼 사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고 싶었다.
단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시를 암송했을 때의 뿌듯함은, 어린 내가 세상에 지지 않고 얻어 낸 작은 승리였다.
시를 외우는 일은 교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식구들이 잠든 밤이면 조용히 대청마루로 나갔다.
차가운 마루의 감촉이 삼베 바지를 스치고, 마당에는 흰 꽃잎처럼 달빛이 쏟아졌다.
나는 그 달빛 아래 홀로 앉아 낮에 배운 시를 입안에서 천천히 씹어 보았다.
등하굣길 십 리 먼지길을 걸을 때도 발걸음은 늘 시의 운율을 따라갔다.
이름 모를 풀꽃도, 개울가를 스치는 바람도 어느새 시의 한 구절이 되어 내 곁을 함께 걸었다.
그때는 시험을 위해 외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내 삶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성적표가 아니라, 그 시절 가슴으로 외워 두었던 시 한 편이었다는 것을.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이순을 넘겼다.
거울 속에는 흰 머리와 깊어진 주름이 먼저 보인다.
어제 만난 사람의 이름도 가끔 잊고,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헤매는 날도 많아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기억은 하나둘 희미해지는데, 어린 시절 달빛 아래에서 외웠던 시는 아직도 선명하다.
눈을 감으면 그 문장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혀끝에서 동글동글 굴러 나온다.
세월도 그 문장만큼은 닳게 만들지 못했다.
이순은 많은 것을 순하게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게 시는 아직도 마음을 깨우는 따뜻한 체온이다.
삶이 쓸쓸해질 때도,
욕심이 마음을 흔들 때도,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때 외웠던 시를 다시 입안에 담는다.
그러면 달빛 가득한 대청마루에서 시를 읊조리던 소년이 다시 찾아와 내 손을 잡아 준다.
그 아이는 가난했지만,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물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오늘 밤도 달빛은 오래전 그 대청마루처럼 내 곁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나는 마른 입술을 열어 오래된 시의 첫 문장을 천천히 불러 본다.
그 소리는 아직도 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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