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저 흐려질 때|세월이 가르쳐 준 삶의 속도

 

초여름 햇살이 길게 비껴드는 오후, 책상 한구석에 무심히 놓인 안경 하나를 바라본다. 두툼한 렌즈와 묵직한 뿔테. 이제는 매일 손이 가는 돋보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돋보기는 내 인생의 물건이 아니었다. 길가 벤치에서 신문을 읽던 어르신의 손에 들린 안경, 지하철에서 코끝에 걸친 채 작은 글씨를 읽던 누군가의 모습.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풍경이라고 믿었다.

학창 시절 내 눈은 참 좋았다. 시력검사표 맨 아래 줄까지 또렷하게 읽었고, 멀리 나는 새의 날갯짓이나 산등성이 들꽃의 흔들림도 남들보다 먼저 알아챘다. 그 맑은 눈을 믿고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세상의 문장들은 막힘없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저녁, 수첩에 적어 둔 전화번호가 희미한 먹물 자국처럼 번져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창밖의 저녁노을은 여전히 선명한데, 손끝의 작은 글씨만 흐려져 있었다.

그 순간 처음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저 흐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무심코 팔을 조금 더 멀리 뻗었다. 손바닥 한 뼘쯤 떨어졌을 때 숫자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그제야 인정했다. 내 몸에서 가장 믿었던 감각 하나가 조용히 시간을 따라가고 있었다.

결국 서랍 속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안경다리가 관자놀이를 누르는 감촉이 낯설었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손등의 주름은 생각보다 선명했고, 펼쳐 놓은 책의 문장들은 다시 또렷하게 살아났다. 흐릿하던 글자는 제자리를 찾았고, 종이의 결마저 생생하게 눈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알았다.

내 눈은 조금씩 제 힘을 내려놓고 있었고, 이제 나는 돋보기의 도움으로 세상을 읽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그것을 나이 듦이라 생각했다. 젊음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돋보기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을 크게 보여주는 안경이 아니었다.

세월이 내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는 손길이었다.

젊은 날의 눈은 세상을 빠르게 훑었다. 더 많이 보고, 더 빨리 읽고, 더 멀리 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은 다르다. 돋보기 너머의 세상은 천천히 바라볼수록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한 줄의 문장을 오래 읽게 되고, 한 장의 사진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표정도, 계절의 바람도, 창가에 번지는 햇살도 예전보다 깊이 마음에 머문다.

나이가 들면서 잃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새롭게 얻는 것도 있다.

속도보다 깊이.

선명함보다 의미.

젊음보다 여유.

어쩌면 그것이 세월이 우리에게 남겨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두꺼운 렌즈 위로 초여름 햇살이 둥글게 번진다.

오늘 밤도 나는 이 돋보기를 다시 코끝에 걸칠 것이다.

이제는 안다.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조금 느리게 읽어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 작은 유리알 하나가 오늘도 조용히 내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일이다. 오늘 당신의 책상 위에도 돋보기 하나가 놓여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안경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작은 창일지 모른다. 그 창 너머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을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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