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리 날을 세우다

식당 유리창을 통과한 봄볕이 놋그릇 둘레에 둥근 빛의 띠를 만든다.
아내가 강된장을 내 쪽으로 밀어놓으며 웃는다.
“요즘 속 부대낀다더니, 보리가 역시 순하네. 쌀밥보다 부드럽게 넘어가죠?”
나는 말없이 숟가락을 든다.
보리밥은 윤기가 흐르고 단정하다. 곱게 도정한 보리쌀은 쌀밥 사이에서 은은한 금빛을 띠며 통통하게 부풀어 있다. 씹기도 전에 고소한 향이 먼저 번지고, 입안에서는 순하게 풀어진다.
그런데도 첫 술을 삼키는 순간, 혀끝이 잠시 얼얼해진다.
내게 보리는 아직도 건강식보다 기억에 먼저 닿는 음식이다.
입술을 베일 듯 날을 세우고 서 있던 겉보리.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가던 까칠한 알갱이. 그 감촉은 세월이 흘러도 혀가 먼저 기억한다.
1970년대의 봄은 푸르러서 오히려 서러운 계절이었다.
겨울을 견딘 들판은 온통 시퍼런 보리 물결이었다. 바람이 언덕을 넘을 때마다 초록 물결이 몸을 뒤척였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숨바꼭질을 했고, 보리 줄기를 잘라 피리를 불었다. 들판은 푸르렀지만 집집마다 밥상은 넉넉하지 않았다. 봄바람 속에는 흙냄새보다 허기가 먼저 섞여 있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양은 도시락이 책상 위에 일렬로 놓였다. 교탁 앞으로 걸어오는 담임선생님의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도시락 뚜껑, 전부 열어.”
순간 교실 공기가 달라졌다.
누군가는 도시락 뚜껑을 천천히 열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대나무 매가 책상을 툭툭 두드릴 때마다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삼켰다.
그 시절에는 쌀을 아껴야 나라가 산다고 배웠다. 백미는 사치였고, 보리를 섞는 일은 애국이었다.
내 손바닥에도 식은땀이 맺혔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셨다. 밥주걱으로 하얀 쌀밥을 바닥 깊숙이 꼭꼭 눌러 담고는, 그 위를 겉보리밥으로 얇게 덮으셨다.
“들키면 안 된다.”
한마디를 남기시며 도시락 뚜껑을 닫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선생님의 젓가락 끝이 내 도시락으로 다가왔다.
쿡.
보리층이 살짝 흔들렸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오면 흰 쌀밥이 드러날 것 같았다. 심장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젓가락은 다행히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그제야 나는 숨을 내쉬었다.
옆자리 친구는 결국 들켰다.
선생님의 꾸중이 이어지는 동안 친구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나는 도시락보다 친구 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검사가 끝났다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밥을 먹어야 했다.
도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겉보리는 가운데 검은 골이 선명했다. 아무리 씹어도 알갱이는 입안에서 따로 놀았고,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반찬이라곤 쉰 짠지 몇 조각이 전부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남기지 않았다.
배고픔은 맛보다 먼저였기 때문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보리는 조금씩 달라졌다.
사람들도 달라졌다.
“왜 그리 밥을 모시고 있어? 식기 전에 비벼요.”
아내의 목소리에 나는 현재로 돌아온다.
아내는 나물을 얹고 참기름을 두른다. 은은한 향이 놋그릇 위로 번진다.
“나는 어릴 때 보리밥이 귀한 음식인 줄 알았어요. 일부러 사 먹는 줄만 알았지.”
아내는 웃으며 말하지만, 나는 함께 웃지 못한다.
같은 보리라도 사람마다 기억은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보리는 건강이고, 누군가에게는 별미다.
그러나 내게 보리는 오래된 교실의 공기이고, 대나무 매 소리이며, 어머니가 새벽마다 눌러 담던 도시락이다.
보리는 달라졌지만 기억은 쉽게 도정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보리밥을 씹는다.
이제 보리는 더 이상 날을 세우지 않는다.
부드럽게 부서지고 고소하게 퍼진다.
하지만 오래 씹을수록 다른 맛이 따라온다.
선생님의 젓가락 끝.
숨죽인 교실.
친구의 숙인 얼굴.
그리고 도시락 뚜껑을 닫으며 “들키면 안 된다.”고 낮게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때 어머니는 쌀을 숨긴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도시락 바닥에 눌러 담으신 것은 쌀이 아니라 자식이 배고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게 창밖으로 봄볕이 쏟아진다.
푸른 보리밭은 이제 아파트 숲에 밀려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풍경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내가 다시 묻는다.
“오늘따라 보리밥 참 맛있게 먹네. 맛있어?”
나는 한참 동안 보리 한 숟갈을 씹는다.
입안에서는 고소함이 번지고, 귀에는 오래전 봄 보리밭을 스치던 바람 소리가 천천히 되살아난다.
나는 그제야 웃으며 대답한다.
“응, 참 달아.”
♣
*관련글 보기
틈을 움켜쥔다는 것: 불완전한 삶에서 시작되는 성장 수필
찾은 들에도 봄은 오는가|번아웃과 내면 회복에 대한 수필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