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길목에 선다면
황혼이 내 삶의 문턱에 닿으면, 수첩 속 이름들을 조용히 접어두리라.
청춘을 가로질러 오며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덧없는 승패와 세상의 소란도 언덕 너머로 놓아주리라.
삶의 저녁이 찾아오면 더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내 곁에 남은 단 한 사람, 아내와 함께 조용한 바다로 떠나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정말 그 바다에 서 있었다.
∞
우리는 오래 걸었다.
말은 거의 없었다.
세월의 무게에 조금씩 떨리는 무릎과 어깨를 서로 가만히 받쳐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대화였다.
볕이 스러지는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 스치는 조개껍데기마다 지난날 우리가 주고받았던 가시 돋친 말들과 무심하게 등을 돌리던 날들이 얹혀 있는 듯했다.
∞
돌아보면 서로에게 입힌 상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없이 방문을 닫던 밤.
찌개가 식었다며 툭 던진 한마디.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산책.
상처는 늘 그런 사소한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바다가 저녁빛을 말없이 품어갈 무렵, 그 모든 기억은 노을빛에 스며들 듯 부드러워진다.
미안하다는 구구절절한 말도, 뒤늦은 변명도 필요 없다.
그저 나란히 서서 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은 서로를 용서한다.
∞
언젠가는 우리 중 누군가가 먼저 이 모래사장에 혼자만의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남겨진 사람의 하루에는 긴 정적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다가올 이별이 두려워 지금 내리는 노을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삶의 마지막 장에 찾아올 침묵마저도 우리는 담담히 맞아들이리라.
먼 훗날 혼자 남게 되더라도 오늘 이 해변에서 나눈 온기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고독쯤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
시선을 내려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어본다.
젊은 날의 매끄럽던 살결은 사라지고, 가뭄 난 논바닥처럼 굵은 주름과 도드라진 마디만 남아 있다.
그 손은 세월을 견뎌온 시간의 기록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아, 당신의 손이 이토록 따뜻했던가.
세상의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느라 거칠어진 이 손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그늘이었구나.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파도는 발자국을 지웠지만, 손끝의 온기만은 끝내 지우지 못했다.
∞
삶의 황혼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황혼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황혼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한 성공도, 수많은 인연도 아니다.
끝내 마음에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손과 그 손의 온기다.
그래서 황혼은 끝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을 다시 만나는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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