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자리에서 다시 푸르러지는 삶, 상처가 가르쳐준 회복

가지치기

 

수원에 있는 아내의 아파트는 2층이다.

안방 침대에 누우면 베란다 창 전체가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로 가득 차오르곤 했다. 초여름이면 수천 개의 초록 부채 같은 잎들이 햇살을 튕겨내며 방 안 깊숙이 연둣빛 그늘을 밀어 넣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은행잎이 사르락거렸다. 도시의 소음과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자장가 같은 소리였다. 우리는 그 푸른 그늘 아래서 계절이 흘러가는 속도를 가늠하곤 했다.

이른 봄 어느 날 아침, 정적을 깨고 창밑에서 거친 톱질 소리가 올라왔다.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다리에 올라 긴 장대톱으로 은행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툭, 툭.

굵은 가지들이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조권을 가린다는 민원과 가을이면 떨어지는 은행 열매의 악취를 미리 막아야 한다는 단지 내 결정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는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저렇게까지 잘라내면 어쩌자는 거야.”

작업이 끝났을 때 창밖에는 굵은 줄기와 원가지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늘 푸른 장막을 드리우던 은행나무는 순식간에 헐벗은 기둥이 되어버렸다.

그날부터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달라졌다.

시원한 그늘 대신 맞은편 아파트 창문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이 들어왔다. 잘려 나간 자리에서는 진득한 진액이 흘러나와 까맣게 말라붙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6월의 볕이 짙어질 때까지도 나무는 죽은 듯 침묵했다. 잘려 나간 단면은 바짝 말라 있었고, 바람이 불어도 더 이상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파트를 오가는 사람들도 어느새 헐벗은 나무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은행나무가 다시 푸르러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상처는 그대로였고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화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장마철에 시작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마디를 뚫고 연두색 새순이 하나둘 돋아났다. 잔가지가 사라진 몸통 곳곳에서 새로운 가지가 솟았다. 새순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햇빛을 향해 잎을 넓혀갔다.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졌다.

여름이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창밖은 다시 푸른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지치기를 당한 은행나무는 죽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시 자라고 있었다.

베란다 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나무를 건너다본다.

잘린 자리마다 돋아난 새 가지들이 한여름의 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그해 봄, 다시는 잎을 내지 못할 것처럼 말라 있던 몸통이었다.

자세히 보면 잘려 나간 자리에는 아직도 톱날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다.

상처는 없어지지 않았다.

나무는 상처를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둘레로 새살을 밀어 올렸다.

바람이 불었다.

새로 난 은행잎들이 한꺼번에 몸을 뒤집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사르락거림이 창을 넘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살면서 잘려 나간 것들도 저럴 수 있을까.

오래 품었던 꿈이 꺾이고, 익숙했던 관계가 멀어지고, 소중하게 여기던 무언가를 뜻하지 않게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있다. 삶에도 가지치기처럼 무언가가 한꺼번에 잘려 나가는 계절이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남은 것보다 잃어버린 것을 먼저 바라본다.

잘려 나간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고, 무엇을 잃었는지 헤아린다. 가능하다면 상처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창밖의 은행나무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린 가지가 다시 붙은 것도 아니었다. 깊게 팬 톱날의 흔적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상처의 가장자리에서 새 가지가 돋았고, 그 가지 끝에서 새로운 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회복은 상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처가 없어져야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품고도 사람은 다시 자신의 계절을 살아갈 수 있다.

잘려 나간 자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새순이 돋듯, 삶도 때로는 잃어버린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낸다.

예전과 똑같지는 않다.

그래도 다시 푸르러질 수 있다.

아내가 말없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나는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예전의 은행나무는 아니었다. 가지가 뻗은 모양도 달랐고, 그늘이 드는 자리도 달라져 있었다. 나무의 몸에는 여전히 잘려 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무는 다시 푸르렀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사르락거렸다.

찻물을 천천히 머금었다.

첫맛은 조금 씁쓸했다.

잠시 뒤, 혀끝에 희미한 단맛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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