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울던 골방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태워 버릴 듯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 거짓말처럼 꺾였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열었다. 바람의 결부터 달랐다. 며칠 전 입추를 지나더니 하늘은 조금 높아졌고, 베란다 아래 풀숲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 내내 들끓던 열기가 물러난 자리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고 있었다.
귀뚜라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억은 오래전으로 돌아간다.
스무 살의 골방으로.
그때 나는 아직 세상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취직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나 몸만은 세상 누구보다 바빴다.
낮에 길에서 스쳐 간 여자의 샴푸 냄새 하나가 밤까지 따라왔다. 우연히 마주친 눈빛 하나에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나이였으므로, 상상은 늘 현실보다 뜨거웠다.
어디로 쏟아야 할지 모를 혈기가 온몸에 팽팽하게 차올랐다. 갈 곳을 찾지 못한 젊음은 밤이면 어김없이 골방으로 돌아왔다.
낮에 벗어놓은 셔츠가 벽의 못 하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머리맡에는 몇 번이나 펼쳤다 덮은 수험서가 놓여 있었다.
책을 펼쳐도 글자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낮 동안 거리를 헤매다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써도 몸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어두운 골방에 모로 누워 홑이불을 걷어찼다.
잠은 오지 않았다.
차가운 장판에 이마를 대보기도 했다. 그래도 몸속 어딘가에서는 알 수 없는 불이 계속 타고 있었다.
그때 창틀 틈새로 새벽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귀뚜라미가 울었다.
서늘한 바람과 귀뚜라미 소리는 타오르는 볼과 이마를 식혀 주던 유일한 냉수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밤을 견뎠다.
외로움도 식기를 바랐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리움도 식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내 몸 안에서 제멋대로 끓어오르던 젊음이 조금만 얌전해지기를 바랐다.
그 시절의 가을밤은 길었다.
그리고 아팠다.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그때는 외로워서 괴로웠다. 세상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몸 안의 열기는 나를 태워 버릴 듯했고, 닿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뜨거움이 어서 식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토록 괴로워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조금 부럽다.
세월은 내가 바라던 대로 많은 것을 식혀 놓았다.
쉽게 달아오르던 마음도, 작은 눈빛 하나에 밤잠을 설치던 가슴도, 무엇인가를 미치도록 갖고 싶어 하던 욕망도 예전 같지 않다.
그 자리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그런데 평온이라는 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쓸쓸한 것이었다.
젊은 날에는 뜨거움이 고통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렇게 뜨거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젊음이었다.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손등을 스쳤다. 풀숲의 귀뚜라미 소리가 한층 또렷해졌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몸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지금의 나는 식어가는 계절 속에서 그때의 열기를 생각한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뜨거울 때는 식기를 바라고, 식어갈 때는 한때의 뜨거움을 돌아본다.
귀뚜라미는 여전히 풀숲에서 울고 있다.
오래전 그 골방에서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어쩌면,
귀뚜라미가 아니라 나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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