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쌈 한 장에 담긴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지워 버렸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상추를 따던 손끝의 감촉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봄이 지나 초여름이 되면 어머니는 마당 한쪽에 상추씨를 뿌리셨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연둣빛 새싹이 올라왔고, 장맛비를 몇 번 맞고 나면 상추는 금세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 사이에서 싱싱한 잎을 펼쳤다.
배가 고프면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잘 자란 상추를 툭툭 따곤 했다.
상추 줄기가 끊어질 때마다 잘린 자리에서는 하얀 진액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린 눈에는 그것이 신기했다.
마치 상추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햇빛을 머금은 상추 잎에서는 풋풋한 향이 났고, 손에는 초록빛 냄새가 배었다.
나는 그 상추를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우물물은 한여름에도 손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상추를 물에 담그면 흙먼지가 가라앉고 잎마다 맺힌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 모습만 보아도 군침이 돌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었기에 쌀은 있었지만 반찬은 늘 부족했다.
밭에서 나는 채소와 나물들이 식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어야 겨우 맛볼 수 있었다.
제삿날 부엌에서 풍겨 나오던 돼지고기 냄새는 어린아이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평소에는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가 훌륭한 간식이었고, 배고픔은 늘 일상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시절이 불행했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배는 자주 고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씀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대신 새벽부터 밭으로 나가셨고, 해가 기울어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거칠어진 손과 검게 그을린 얼굴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흔적이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고프면 상추 따서 밥 싸 먹어라.”
그 말 속에는 걱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다.
어느 날도 나는 평소처럼 상추를 따서 우물물에 씻었다.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한 숟갈 퍼 왔다.
따뜻한 밥을 상추 위에 올리고 고추장을 얹어 크게 쌌다.
고기 한 점 없는 상추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소박한 음식이다.
그러나 그때의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상추의 쌉싸름한 맛.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
고추장의 짭조름하고 매콤한 풍미.
그리고 허기를 달래 주는 포만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어린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먹을 것은 넘쳐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비싼 한우도 먹어 보았고 유명한 음식점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어린 시절 상추쌈이 생각난다.
그래서 가끔 상추를 사 와서 같은 방법으로 쌈을 싸 먹어 본다.
그러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상추도 같고 고추장도 비슷한데 무엇인가 다르다.
오랫동안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상추의 맛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먹은 상추쌈에는 밥과 고추장만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식이 굶을까 걱정하던 어머니의 사랑이 들어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가족을 먹이고 키워 내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 맛은 어떤 음식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는다.
장독대도 사라졌고 우물도 메워졌다.
마당 가득 자라던 상추밭 역시 기억 속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상추를 툭 따던 순간의 감촉은 아직 남아 있다.
줄기가 끊어지며 맺히던 하얀 진액도 기억난다.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그던 느낌도 생생하다.
그리고 저녁 무렵 마당을 바라보며 일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사람들은 행복이 특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 주던 시간.
배고프지 말라고 상추를 심어 주던 마음.
많이 먹으라고 등을 떠밀어 주던 사랑.
그런 것들이 진짜 행복이었다.
지금도 상추쌈을 먹을 때면 나는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은 상추의 쌉싸름한 맛이 아니라, 그 상추를 키워 내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상추쌈 한 장에 담긴 그 사랑만은 아직도 내 삶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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