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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버린 북어처럼 지친 너에게” 어머니가 아침 여섯 시, 부엌은 아직 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시간.나는 북어 한 마리를 꺼낸다.찬물에 담그니 바삭하게 말랐던 몸이 천천히 풀려간다.시장 골목에서 골라 들고 온 그 순간이 떠오른다.손바닥보다 조금 큰, 잔잔한 주름이 선한 녀석이었다.오늘은 이 녀석으로 너를 위로해주려 한다. 어제도 문 소리가 새벽녘에야 들렸지.술 냄새에 말은 없었지만,너의 굽은 어깨가 말해주더라.세상 밖이 얼마나 버거웠는지를.솥에 참기름을 두르고 북어를 달달 볶는다.고소한 냄새가 퍼질 때 마늘을 넣고, 대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끓기 시작한 국물에 달걀을 풀며 나는 생각한다.이 국 한 그릇이오늘 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덥혀주면 좋겠다고. 잠결에 눈 비비며 주방에 나온 너는아직 어제의 그림자를 짊어진 채 앉는다.국물 한 숟갈 떠넣는 그.. 2025. 4. 21.
외나무다리에서 나를 만나다 어느 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라디오도, 휴대폰 알림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멈춘 듯했다.세상이 갑자기 정지된 것 같은 그 순간, 나는 침묵과 적막 속에 홀로 서 있었다.이 고요는 마치 오래된 우물 속에 가라앉은 돌처럼 무겁고 깊었다.그 적막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엔 낯선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그것은 뼈저린 외로움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휴식"이라 부르지만,어떤 고요는 안식을 주기보단, 내면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그 순간, 나는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는 나를 떠올렸다.위태롭고 좁은 그 다리 위에서, 나는 나 자신과 마주 서 있었다.그곳에는 회피도,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억지로 웃으며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고,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나를 꾸며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 2025. 4. 21.
봄은 노랗게 투정부리며 온다 쳇, 쳇, 쳇—일꾼들의 손놀림은왜 이리 더딘지,햇살에 눈꺼풀이 간질간질하품처럼 스르르 열리다그만 먼저 나와버렸지. 조금 이른 걸까.바람은 자꾸 치마를 들추고,노란 가방에 노란 옷,병아리 같은 아이들이재잘재잘 몰려온다.뭐가 그리 신나는 걸까. 쳇, 쳇, 쳇—화장품 냄새가 자꾸 코를 찌르고땅벌도, 나비도 보이질 않네.목련 그늘진 울타리 아래,우리는 서로 기대어먼저 주둥이가 터졌어 쳇, 쳇, 쳇—봄날 오후,삐죽삐죽노랗게 피어나는개나리의 작은 투정들. *관련글 보기https://sunbicheonsa.com/62 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봄 하늘을 훔쳐간 구름이어디선가 조리개를 열었다.높새바람 따라물줄기들이 사뿐히 쏟아진다. 삭정이 틈 사이,겨울을 견딘 껍질이 슬며시 벌어지고그 아래서 작은 신음이 움튼다. .. 2025. 4. 20.
방아쇠를 당긴 건 나였다 아침이었다.산 너머 햇살이 눈을 찌른다.나는 반사적으로숨을 크게 들이쉰다.‘찰칵.’속에서 뭔가정확하게 준비됐다. 누구도 나를 겨눈 적 없다.나는내가 갈 방향을 스스로 정했고,방아쇠를 당긴 것도나였다. 그 순간부터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한 알의 총알처럼. 표정 없이감정 없이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앞만 보고 달린다. 흙먼지 날리는 마당을 지나물안개 낀 강가를 건너고답답한 공기처럼 무거운사람들의 말과 시선을 통과한다. 길은 명확하지 않다.표지판도 없다.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내가 향하고 싶은 곳이 있었고,그게 있다는 걸나는 믿었다. 산을 넘고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끝끝내,작은 언덕 하나.모든 소음이 멎는 곳. 거기까지나는 가고 싶었다. 달리면서 생각은 스친다.두려움도, 후회도머릿속에 총알처럼 튄다.하지만 어.. 2025. 4. 20.
선인장 연서 한 번쯤은 마주친 적 있을 거예요.작은 화분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선인장. 그 모습은 늘 같아 보여도,그 안에는 사막을 견디는 강인함과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 숨어 있어요. 사막 한가운데 선 선인장은 깊은 뿌리가 없어요.모래 위에 겨우 뿌리 몇 가닥을 내리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태양이 칼처럼 내리쬐어도,거센 바람이 모래를 휘감아도,그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두 팔처럼 뻗은 가지를 하늘로 들어 올린 채오늘도 조용히 말하는 듯해요. "나는 괜찮아. 나는 살아 있어." 낮에는 딱딱했던 선인장.하지만 밤이 되면, 별빛 아래 이슬을 머금어요. 그 이슬은 어쩌면,누군가를 향해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사랑의 흔적일지도 몰라요. 이 선인장의 이름은 ‘백년초’.100년을 살아도 변치 않는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2025. 4. 20.
벚꽃은 지고, 사랑은 남았다 올해도 벚꽃은 어김없이 피었다.언제나 그랬듯 갑작스럽게, 그리고 눈부시게.거리마다 연분홍빛이 흐드러졌고, 사람들의 얼굴엔 봄이 번졌다.그 환한 꽃들 사이를 함께 걷고 싶었다. 당신과.아무 말 없이 손잡고, 꽃잎 사이로 웃음소리 퍼뜨리며 그렇게.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올해 봄엔, 벚꽃이 피면 당신과 함께 걸으리라.꽃향기를 함께 맡고,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당신만을 바라보리라.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너무 당연하게 여긴 걸까.벚꽃이 피는 것도, 당신이 곁에 있는 것도.바쁘다는 이유로, 괜찮을 거라는 안일함으로나는 당신의 마음에 피어난 작은 꽃들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봄은 깊어졌고,꽃은 어느샌가 지고 말았다.꽃잎은 말이 없다.지며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당신도.. 202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