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날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내가 견뎌낸 고통의 값이다.” 출근길의 답답한 지하철, 부당한 질책, 야근의 형광등 아래서 버틴 시간들. 월급은 그 모든 고통을 수치로 환산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그 돈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증표처럼 느껴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종종 상상을 한다. 만약 내가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다면, 그 세상은 어떤 원리로 작동할까? 하나의 법칙이 떠오른다. 고통의 크기만큼 보상을 받는 세계. 고통받은 자는 부를 얻고, 안락한 자는 점차 가난해진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보상이 있고, 안락이 지나간 자리에 책임이 생기는 순환 구조. 이 구조는 모든 계층에 희망을 주고, 누구도 절망에 고여 있지 않게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 복음서에서 예수는 말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고통을 경험한 자가 결국 위로를 받는다는 천국의 원리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도 이를 상징한다. 부자의 대문 앞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간 나사로는 죽어 천상의 위로를 받지만, 지상에서 풍요를 누린 부자는 사후에 고통을 받는다. 고통의 상대성에 따라 천상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이다.
불교도 삶을 고해(苦海)라 한다. 모든 존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넌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고통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끝없이 물속에 잠겨 허우적대고,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유람선 위에서 와인을 마신다. 고통은 불균형하게 배분되고, 그 불균형은 세습된다. 가난은 가난을 낳고, 특권은 또 다른 특권을 만든다. 출발선은 다르고, 달리는 트랙조차 다르다.
그 속에서 종교는 사후 보상을 약속한다. 하지만 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보상받을 수 없을까? 왜 정의는 죽은 뒤에야 작동해야만 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통에 따라 보상받고, 안락에 따라 책임지는 구조는 지금 이곳에서도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리를 조금 비틀어 이렇게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고통에 따라 받고, 안락에 따라 나눈다.” 이 세계는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과장하거나, 안락을 숨기려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다. 이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영원히 밑바닥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보상이 되고, 오늘의 안락은 내일의 책임이 된다. 정의는 삶 속에서 순환한다.
지하철에서 피곤한 얼굴들을 본다. 모두 각자의 고통을 안고 하루를 마친다. 예수가 말한 천국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국은 멀다. 죽어야만 갈 수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곳에서 실현되는 천국을 꿈꾼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린다.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 고통이 가치로 전환되고, 정의가 작동하는 세계. 그 세계에서 오늘의 나와 당신이 견딘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그것이 내가 꿈꾸는 고통의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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