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을 들자
술빛이 먼저 흔들렸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잔 속의 얼굴이 먼저 일그러졌다.
밤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작은 빛 하나만 남아 있었다.
유리잔 가장자리에 맺힌 물기가
조용히 떨렸다.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람들은 말한다.
생각은 머리에서 시작된다고.
어떤 이는 심장을 말한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머리도, 가슴도 아닌
어딘가 빈자리처럼 느껴졌다.
창밖에서 새가 울었다.
소리는 또렷했지만
내 안에 닿지 않았다.
꽃향기가 스쳤다.
향기는 분명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세상은 제자리에 있었는데
내 마음의 주소만
잠시 지워진 것 같았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잊겠다고 하면 더 선명해지고
놓겠다고 하면 더 오래 남는다.
붙들겠다고 하면
손을 빠져나간다.
잔을 다시 기울였다.
술빛이 흔들리자
그 안에 비친 이름도 함께 흔들렸다.
나는 나인데
고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의 주소를 옮겨놓고,
어떤 기억 하나가
번지를 바꿔버린다.
그제야 알았다.
마음은
내 몸 안에 있지만
완전히 내 소유는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마음은
잠시 머무는 우편물 같다.
내 이름이 적혀 있지만
항상 내가 보낸 것은 아니다.
술잔 속 얼굴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았다.
내 마음의 주소가
오늘 이 자리인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지
끝내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잔을 내려놓은 자리 위에
조용한 온기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아직 나를 통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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