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문을 열었을 때,
바람보다 먼저 냄새가 들어왔다.
덜 녹은 겨울의 냄새였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냄새를 오래 맡고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가 있었고,
노트북 화면에는 어젯밤 쓰다 만 문장이 멈춰 있었다.
커서는 계속 깜빡였지만,
나는 그 뒤에 아무것도 이어 쓸 수 없었다.
메신저 알림이 몇 번이나 울렸다.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조금 무서운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
그때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시였다.
나는 그 문장을 한동안 떠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
일도 있었고,
사람도 있었고,
포기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텅 비어 있었다.
며칠 동안 같은 상태가 이어졌다.
출근은 했고,
일도 했고,
웃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느끼지 않고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였다.
며칠 뒤,
퇴근길에 일부러 돌아서 걸었다.
빠른 길 대신,
사람이 거의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문 닫은 가게 앞에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말라 있던 줄기 끝에
아주 작은 연두색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이상하게 오래 서 있었다.
그건 특별한 장면이 아니었다.
누구도 멈추지 않았고,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알 것 같았다.
아, 봄은 이렇게 오는 거구나.
크게 변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조금씩,
거의 티 나지 않게 시작되는 것.
그날 이후로
나는 한 가지를 바꿨다.
아침에 바로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잠깐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많았고,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사소한 변화가 생겼다.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마셨을 뿐이었는데,
그날은 처음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바쁘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서 봄을 물었다.
나는
찾은 들에서 같은 질문을 한다.
“정말, 봄은 오고 있는가.”
이제 그 질문의 의미를 안다.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아직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상태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골목에서 보았던
작은 연두색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무언가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봄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조금씩,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온다.
오늘도 나는
창문을 연다.
그리고 잠깐, 멈춘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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