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아직 물속에 있다|기억과 시간의 감정을 담은 한국 현대시

저수지는 아직
입을 다문 채
빛을 삼키고 있다

둑에 서면
발밑에서 마른풀들이
지난해의 소리를 낸다

그 소리 사이로
붉은 것이 떠오른다

물앵두를 깨물던 오후,
우리 입술은 작게 번져
저수지 끝까지 닿았고

억새풀을 꺾어 엮던 방석 위에
햇살은 먼저 와 앉았다

개삘기 속을 씹다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웃던 순간,
희옥이 댕기는
바람에 묶였다가
풀리곤 했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므로
아무 데로나 달아날 수 있었다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이 나를 붙들고 있어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한다

저수지는 붉지 않다

나는 물가에 서서
한 번 입술을 깨문다

피는 나지 않고
맛도 번지지 않는다

물 위에 엷은 금이 간다

잠깐,
어디선가 웃음이 떠오르는 듯하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저수지는 다시
입을 다문다

봄은
아직
물속에 있다

*관련글 보기

어린 시절 뒷산에서 놀던 기억, ‘산 토꿩대’의 추억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봄은 아직 물속에 있다|기억과 시간의 감정을 담은 한국 현대시”에 대한 2개의 생각

  1. 저수지, 물, 봄 등 상징 의미를 찾느라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오독도독자인 문학 수용자의 몫인고로 자유롭게 시를 읽어 봅니다.
    시의 내용이 ‘우리’ 이야기를 쭉하시다가. 중간부터는 ‘나’의 이야기로 바뀌었네요. 과거 ‘우리’ 이야기에 대한 현재 ‘나’의 생각이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시로 보입니다. 현재 ‘나’ 가 있는 저수지 둑은 ‘우리’로 묶인 ‘희옥’과 지난 추억이 있는 공간이겠구요. 곁에 희옥이 없어 홀로인 ‘나’는 그 추억을 쫓아 그 곳에 서 있겠구요. 그런데, 산 골짜기의 물들이 저수지로 흘러들어 괴듯, 생각들이 모여 괸 곳은 존재의 마음이겠네요. 그리고 ‘꾸다’에서 파생된 것이 ‘꿈’이고, ‘서다’에서 명사 ‘섬’이 생겼듯이, ‘봄’은 동사 ‘보다’에서 생겨난 명사겠네요. 즉, 화자 ‘나’가 저수지 둑을 서성이는 것은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추억의 실체를 더듬기 위함이겠군요. 인생은 추억 만들기와 그 만들어진 추억들을 추억하기 라는데, 너무 귀한 추억이라 한 발 벗어날 수도 없는 그 추억을 추억하기 위해서.

    답글
    • 울림님, 시의 행간을 세밀하게 짚어주신 정성 어린 감상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시는 과거의 눈부셨던 ‘우리’와 홀로 남겨진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를 저수지라는 공간을 빌려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특히 ‘봄’을 ‘보다’라는 능동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명사로 풀이해주신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저수지 둑에 서서 물속을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결국 내면의 추억과 대면하려는 시도였음을 울림님께서 완벽하게 보완해 주셨네요.

      “인생은 추억 만들기와 그 추억들을 추억하기”라는 울림님의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이 발목을 잡는 듯하지만, 그만큼 귀한 기억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위안이 됩니다.

      부족한 글에서 마음의 무늬를 찾아내어 따스한 온기를 더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 안의 봄도 조금 더 선명해진 기분입니다.

      답글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