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에게 통장을 하나 건넸다.
“네 이름으로 된 거야. 이제부터는 네가 벌어야 해.”
말은 담담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눌렀다.
통장 속엔 몇 십만 원의 잔고와 함께, 내가 앞으로 책임져야 할 '삶'이 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세상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실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얇고 투명했으며, 때로는 목을 조일 만큼 질겼다.
돈은 나를 성장시켰다.
아르바이트로 처음 받은 월급은 교과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안에는 손님의 불평, 사장의 눈치, 그리고 내 몸의 피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통장 잔고가 늘어날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기보단 무거워졌다.
마치 발밑에 쌓이는 모래주머니처럼.
돈은 내 자유를 담보로 조금씩 쌓여갔다.
나는 종종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그림자를 생각한다.
그림자는 언제나 내 몸의 방향을 따라오지만, 결코 앞서지는 않는다.
돈도 그렇다.
내가 움직여야 따라오고, 내가 멈추면 그저 바닥에 머무는 것.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이 나를 비추는 빛이 되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루소는 말했다.
“불평등은 사유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일찍부터 불평등을 느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몇 백 원이 없어 과자 하나를 사지 못하던 기억,
친구들 사이에서 깨끗한 옷 하나 없는 자신이 작게 느껴졌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이 내 안에 어떤 ‘부족함’이라는 감정을 뿌리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후 내가 돈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돈이 부족했던 순간이 꼭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을.
서울 외곽의 오래된 고시원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던 친구와의 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웃음이 많았던 시간이다.
반대로, 정규직이 되어 월급을 받기 시작한 뒤로는
웃음보다 계산이 먼저 앞섰다.
돈은 나를 인간답게 살게도 했지만,
때론 인간 같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단순히 균형의 덕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행복’을 이루기 위해
덕을 통해 자신을 통제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나에게 돈은 그 중용의 무게추다.
너무 가벼우면 흔들리고,
너무 무거우면 삶이 기울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돈을 멀리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려 한다.
그저 삶을 지탱할 만큼만 품고,
그 너머의 가치를 들여다보려 한다.
돈은 그림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그림자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림자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돈을 따라 살지만,
그 돈이 우리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이다.
빛이 앞에 있을 때,
내 그림자는 늘 뒤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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