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앞에서 깨달은 인생의 자유와 받아들임의 지혜

일요일 저녁이었다.
퇴직교사 셋이 부부 동반으로 만났다. 반년에 한 번쯤 보는 사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기에 만날 때마다 이야기가 쌓여 있다. 그래서 헤어질 시간이 되면 늘 아쉽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 이야기, 건강 이야기, 자녀와 손주 이야기, 여행 이야기까지 화제는 끝이 없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았다. 오랜 세월 같은 교단에 몸담았던 사람들끼리는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웃음이 피어난다.
함께한 두 분 선생님은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분들이다.
한 분은 지리교사였다. 나는 그분을 늘 형님이라 부른다. 다재다능한 분이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도 능숙하고, 낯선 길에서도 방향을 잘 찾는다. 무엇보다 부지런하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움직인다. 희생과 배려를 생활처럼 실천하며 살아온 분이다.
또 한 분은 국어교사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지만 오랜 세월 글벗으로 지내왔다. 가끔 내 글을 읽고 소감을 들려주신다. 그분은 문장보다 행간을 잘 읽는다. 내가 무심코 쓴 문장 속에서조차 내 마음의 움직임을 발견하곤 한다. 글의 표면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생각과 감정을 더 잘 보는 사람이다. 심지가 굳고 사람을 깊이 바라보는 분이기도 하다.
그날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네 시간이 흘렀다.
허리가 뻐근해지고 엉덩이가 배겨 올 무렵, 우리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 문을 열었다.
순간 모두 발걸음을 멈추었다.
폭우였다.
마치 누군가 하늘의 거대한 수문을 열어젖힌 것 같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빗줄기는 선이 아니라 벽처럼 보였다. 길바닥은 금세 물길로 변해 있었고, 차들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이건 좀 기다려야겠는데요.”
누군가 말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님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우산 좀 사 올게.”
형님과 다른 선생님 한 분이 십여 미터 앞 마트로 뛰어갔다.
잠시 후 두 분은 새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트 차양 위에 고인 빗물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산이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길 위에 불어난 물은 이미 발목 가까이 차오르고 있었다.
택시를 불렀다.
오지 않았다.
다시 불렀다.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폭우 때문에 손님이 몰렸을 것이다.
우리는 커피숍 문 앞에 나란히 서서 비를 바라보았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젖기 싫었다.
신발도 젖고 양말도 젖고 바지도 젖을 것이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온몸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젖지 않을 방법을 기다리는 걸까.
문득 내 삶의 여러 순간이 떠올랐다.
교단을 떠나기 전에도 그랬다.
은퇴를 앞두고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익숙한 교실을 떠나면 허전할 것 같았고, 하루가 길고 무료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은퇴를 하고 보니 삶은 또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다.
나이가 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받아들이기 싫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데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내가 말했다.
“그냥 갑시다.”
형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집에는 가야지.”
국어 선생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휴대전화와 지갑을 단단히 챙겼다.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종아리를 때리는 빗방울이 느껴졌다.
신발 안으로 차가운 물이 스며들었다.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났다.
조금 전까지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던 폭우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장대비 속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우리를 붙잡고 있던 것은 비가 아니었다.
젖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내려놓자 몸도 가벼워졌다.
형님도 웃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도 웃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소풍길에 나선 아이들처럼 빗속을 걸었다.
그리고 스무 미터쯤 갔을까.
거짓말처럼 빗줄기가 약해졌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뒤덮던 폭우가 힘을 잃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 우연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결심 때문에 비가 멈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장면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 국어 선생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읽어내실지 가끔 궁금하다.
아마 그분은 폭우보다도 커피숍 문 앞에서 이십 분 동안 서성거리던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보실 것 같다.
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젖기 싫어서 움직이지 못했던 사람들.
그리고 결국 젖을 것을 받아들이고 걸음을 내디딘 사람들.
돌아보면 그날 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폭우가 아니었다.
마트로 뛰어가 우산을 사 온 형님의 부지런함도,
묵묵히 상황을 바라보던 국어 선생님의 침착함도,
젖을까 봐 망설이던 내 모습도,
모두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
비는 그날 밤에 그쳤지만, 인생의 비는 지금도 계속 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삶을 바꾸는 것은 비가 그친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한 순간이라는 것을.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그 밤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아직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비를 맞을 결심을 했는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삶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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