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으로 가는 길

소래산 자락 아래 작은 밥집에 앉아 아내와 된장찌개를 마주한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천천히 식탁 위를 채운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삼키는 순간, 오래전부터 걸어온 길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돌아보면 내 삶은 늘 식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로 가는 길에는 양은 도시락이 함께했다. 도시락 모서리는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고, 고무줄로 겨우 뚜껑을 묶어 다니던 날도 많았다. 점심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선생님이 칠판을 향해 돌아서는 사이 책상 서랍을 살짝 열고 식은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곤 했다. 그 밥은 맛있는 음식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그때는 도시락만 보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도시락이 새벽마다 부엌에 불을 밝히던 어머니의 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밥을 짓고 반찬을 담아 식지 않게 싸 주던 마음까지는 미처 보지 못했다. 어린 나에게 식탁은 배를 채우는 곳이었지만, 어머니에게 식탁은 가족을 지키는 자리였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또 다른 길을 걸었다. 훈련소에서 식당으로 향하는 길은 짧았지만 멀게 느껴졌다. 식판을 옆구리에 끼고 군가를 부르며 걷던 시간, 허옇게 김이 서린 식당 창문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국은 묽었고 반찬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남기지 않았다. 한 그릇의 국은 허기를 달래는 음식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용기였다.
교단에 선 뒤에도 식탁은 늘 하루의 중심에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급식실에서 마주한 식판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나누던 짧은 웃음, 식판 위에서 부딪히던 숟가락 소리는 바쁜 하루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쉼표였다. 그 무렵부터 밥은 더 이상 나만을 위한 식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정을 책임지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힘이었다.
퇴근길에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싶어 할지,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지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밥집을 찾아 줄을 서는 일도 즐거웠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배불렀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가장 행복한 식사는 내가 많이 먹는 식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잘 먹는 식사라는 것을.
그 곁에는 늘 아내가 있었다. 아이들 반찬을 먼저 챙기고, 모두가 식사를 마친 뒤에야 조용히 숟가락을 들던 사람. 젊은 날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그 모습이 이제는 가장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함께 식탁을 지켜 온 시간만은 더욱 단단해졌다.
은퇴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길을 걷는다. 아침이면 소래산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 작은 밥집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서두를 이유도, 시간을 재촉하는 종소리도 없다. 계절을 바라보고, 나무 그늘 아래 잠시 멈춰 서기도 한다. 식탁은 예전보다 소박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풍성해졌다. 따뜻한 된장찌개 한 그릇이면 충분하고, 마주 앉아 나누는 몇 마디 말이면 하루가 넉넉해진다.
가끔은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길도 천천히 걸을 수 없을 날이 올 것이다. 숟가락 하나 드는 일조차 힘겨운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그런 계절은 온다. 그래서 오늘의 식탁이 더 소중하다. 내 발로 걸어와 마주 앉을 수 있고, 내 손으로 숟가락을 들 수 있으며,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계산을 마치고 밥집 문을 나선다. 저녁노을이 소래산 능선을 붉게 물들이고, 골목마다 밥 짓는 냄새가 번진다. 나는 말없이 아내의 손을 잡는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나를 식탁으로 불러 주었고, 한때는 내가 가족을 위해 식탁으로 향했다. 이제는 아내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걷는다.
돌아보면 인생은 먼 곳을 향해 달려온 시간이 아니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걷고, 가족을 먹이기 위해 걷고, 사랑하는 사람과 한 끼를 나누기 위해 걸어온 길이었다. 그 길 끝에는 언제나 식탁이 있었고, 그 식탁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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