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球)의 연대기: 양파 껍질을 벗기며, 비어 있는 중심을 향한 문학적 사유

구(球)의 연대기
― 양파 껍질을 벗기며

식탁이라는 사각형의 세계 위.

그 한가운데,
지독하게 둥근 무덤 하나가 놓여 있다.

칼날이 스칠 때마다
양파는 조용히 문을 연다.

문은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고,
방은 다시 더 깊은 방을 품는다.

안쪽으로 갈수록
벽은 얇아진다.

그러나 중심은 끝내 닿지 않는다.

손가락은 오늘도
붉은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낸다.

그 반복은
하루를 닮았다.

어제 지나온 길과
내일 다시 걸어야 할 골목이

겹겹의 곡선 사이에
조용히 눌려 있다.

지워진 기억은
매운 바람이 되어 돌아오고,

눈물이 차오르는 동안
나는 같은 주소를 다시 적는다.

마지막 껍질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칼끝은 마침내
자신의 그림자를 찌른다.

식탁 위에 남은 것은

둥근 공기 한 줌과
지독하게 하얀 침묵.

그제야 알게 된다.

양파에는
붙잡을 알맹이가 없었다.

중심은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로
세계의 숨이 드나들고 있었다.

텅 빈 손바닥 위에서

수많은 껍질이
나비처럼 흩어진다.

나는 다시
그 둥근 무덤 앞에 선다.

그리고 내일도,

양파의 시간을 열기 위해
조용히 칼날을 갈아둔다.

 

 


작품 해설

〈구(球)의 연대기〉는 양파를 통해 인간의 기억, 반복, 시간, 그리고 비어 있는 중심을 탐색하는 문학시이다.

양파는 벗겨도 끝이 없는 삶의 층위를 상징한다. 반복되는 일상은 새로운 시작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까지 도달한 중심은 실체가 아니라 빈자리이다. 그러나 바로 그 빈자리 덕분에 세계는 숨 쉬고, 삶은 계속된다.

이 시에서 양파, 껍질, 구(球), 중심, 반복, 침묵은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루며, 존재를 설명하는 핵심 이미지로 기능한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벗겨내며 살아간다. 그리고 비어 있음 속에서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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