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오디세이》 영화평|그는 왜 집으로 돌아왔는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귀향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귀향은 반드시 사랑과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그는 가족에게 돌아온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잃어버린 자리와 권력을 되찾으러 온 것인가.
이 질문은 크리스토퍼 놀란 《오디세이》 영화평에서 가장 흥미롭게 바라볼 지점이다. 영화는 영웅의 귀환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대한 목적이 타인의 희생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이전처럼 따뜻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서양 문학을 대표하는 귀향 서사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가기까지 겪는 약 10년의 방랑을 다룬다.
트로이 전쟁에서 보낸 시간까지 합치면 오디세우스는 약 20년 동안 고향 이타카를 떠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전쟁이 끝났다.
영웅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단순한 명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집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몸과 사고에는 여전히 전쟁이 남아 있다.
오랜 전쟁은 한 인간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오디세우스는 전쟁터에서 속이고, 의심하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계산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그런 능력은 지혜와 전략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같은 능력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쟁터에서는 적을 쓰러뜨리면 영웅이 된다.
집에서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어쩌면 괴물과 싸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의 표류는 단순한 신화적 모험을 넘어선다. 전쟁은 끝났지만 한 인간의 내면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특정한 정신질환으로 진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귀향을 원하면서도 정작 귀향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인간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여정은 집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인 동시에 귀환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여행처럼 읽힌다.
더 불편한 것은 그 대가를 오디세우스 혼자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하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오디세우스는 살아남는다.
여기에서 영웅 서사의 오래된 잔혹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웅은 살아남아 자신의 모험을 이야기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영웅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사건이 된다.
영웅에게는 시련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생의 끝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의 시선으로만 《오디세이》를 읽어온 것은 아닐까.
오디세우스의 고난이 위대해질수록 그의 곁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야기의 배경으로 밀려난다.
살아남은 사람의 이름은 신화가 된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신화를 완성하는 재료가 된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조금씩 다른 의미를 얻는다.
처음에는 사랑처럼 들린다.
그다음에는 의무처럼 들린다.
마지막에는 명분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목적이 숭고하다고 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된 모든 수단까지 숭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오디세이》를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권력과 책임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한 지도자의 위대한 목적은 어디까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관객을 오디세우스의 배에 태운다.
우리는 그의 생존을 바란다.
그의 귀환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배에서 끝까지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인물은 페넬로페다.
페넬로페를 단순히 ‘남편을 기다린 정숙한 아내’라고 설명하면 그녀가 견딘 20년은 너무 쉽게 사라진다.
오디세우스에게 그 시간이 전쟁과 방랑이었다면 페넬로페에게 같은 시간은 권력의 공백을 견디는 세월이었다.
왕은 없었다.
그러나 왕국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수많은 구애자의 압박 속에서 누군가는 이타카의 질서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 사람이 페넬로페였다.
따라서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한 정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정을 미루는 것이 결정이 된다.
시간을 버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 된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타카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20년 동안 이타카를 지킨 사람은 누구인가.
바다를 건너 돌아온 오디세우스인가.
아니면 그가 없는 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딘 페넬로페인가.
구애자들을 바라보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그들을 정의로운 개혁 세력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부재를 이용한다.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압박하고 왕의 빈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그들 역시 권력을 욕망한다.
하지만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구애자들이 탐욕스럽다는 사실과 그들을 죽이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면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디세우스가 궁전으로 돌아와 활을 들고 구애자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는 《오디세이》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가운데 하나다.
전통적인 영웅 서사의 문법에서는 질서의 회복이다.
가짜 주인이 사라진다.
진짜 왕이 돌아온다.
그러나 현대적인 정치 감각으로 바라보면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지배자가 돌아와 자신의 정통성을 근거로 그동안 만들어진 권력 관계를 폭력으로 제거한다.
오디세우스에게 왕위를 되찾을 권리가 있었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정당한 권리는 어디까지의 폭력을 허용하는가.
권리가 정당하다는 사실과 그 권리를 되찾는 모든 방법이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되찾으려는 가정은 이미 그가 떠났던 날의 가정이 아니다.
페넬로페는 달라졌다.
텔레마코스는 성장했다.
이타카도 변했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달라졌다.
그가 돌아갈 수 있는 장소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시간은 이미 사라졌다.
사람은 장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이 《오디세이》의 귀향을 가장 슬프게 만드는 역설이다.
우리는 흔히 귀향을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떠난 사람이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오면 여행은 끝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귀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집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집을 떠났던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
기다린 사람도 달라진다.
아이는 성장한다.
사랑의 모습도 변한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정말 잃어버린 것은 고향이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텔레마코스는 이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는 실제 인간이기 전에 하나의 이야기였다.
위대한 왕.
트로이 전쟁의 영웅.
뛰어난 전략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아버지.
아버지가 부재할수록 아버지의 신화는 커진다.
실제 인간은 곁에 없기 때문에 실망시킬 수도 없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사람보다 전설에 가까워진다.
문제는 전설이 실제 인간의 얼굴을 하고 돌아왔을 때 시작된다.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도 폭력이 남아 있다.
텔레마코스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이 기다렸던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이 믿어온 영웅 신화를 흔드는 인간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과도 닮아 있다.
우리 역시 오디세우스가 영웅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야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영웅’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영화는 영웅주의의 폭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동시에 영웅을 거대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바다는 압도적이다.
파도는 인간을 집어삼킬 듯 밀려온다.
전쟁과 육체, 배와 활은 거대한 영화적 이미지가 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작아진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은 오히려 더욱 커진다.
우리는 그의 폭력을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활을 들기를 기다린다.
그의 행동을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화살이 날아가는 순간 영화적 쾌감을 느낀다.
영화는 영웅주의의 폭력을 의심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영웅주의의 쾌감을 제공한다.
바로 이 모순이 크리스토퍼 놀란 《오디세이》 영화평에서 가장 흥미롭게 바라볼 부분이다.
관객도 이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강력한 권력을 경계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강력한 영웅을 원한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압도적인 승리에 환호한다.
어쩌면 오디세우스가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만 존재하는 영웅이 아니다.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얼굴로 반복되는 영웅의 원형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영화의 약점을 모두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주제 의식은 때때로 인물을 인간보다 하나의 개념처럼 보이게 한다.
오디세우스는 전쟁과 권력의 상징이 된다.
페넬로페는 기다림과 정치의 상징이 된다.
텔레마코스는 다음 세대의 상징이 된다.
해석은 풍부해진다.
그러나 인간적인 감정은 때때로 멀어진다.
2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만이 아니다.
침묵이 필요하다.
망설임이 필요하다.
낯섦도 필요하다.
서로 사랑하지만 더 이상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필요하다.
그 감정의 틈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다면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디세이》를 단순히 차갑고 거대한 영화라고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영화가 마지막까지 남기는 것은 오히려 그 거대함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이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돌아온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고향에 도착했다.
자신의 자리도 되찾는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가.
이 단순한 질문 앞에서 영웅 신화는 흔들린다.
《오디세이》가 흥미로운 이유는 오디세우스를 악인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선과 악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인간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다.
그는 뛰어난 지도자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정당한 왕이다.
그러나 권력을 되찾는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한다.
그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생존자이면서 파괴자다.
아버지이면서 전사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오래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한다.
위대한 목적은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당한 권력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과거의 영웅은 다음 세대에게도 반드시 영웅이어야 하는가.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기억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폭력을 비판하면서도 강한 영웅에게 매혹되는가.
영웅주의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영웅이 폭력을 사용할 때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폭력을 필요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더 위험해진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오디세우스가 영웅인가 폭군인가를 판결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그가 폭군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은가.
영화 역시 이 모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영웅주의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영웅을 거대하게 보여준다.
폭력을 문제 삼으면서 그 폭력을 장엄한 스펙터클로 만든다.
오래된 신화를 인간의 이야기로 끌어내리면서 다시 거대한 화면 위에 신화로 세운다.
그래서 이 영화의 한계와 성취는 같은 곳에서 만난다.
너무 거대하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 압도적이다.
그 때문에 자신이 의심하게 만드는 영웅주의마저 매혹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거대한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질문 하나는 남는다.
누구의 희생 위에서 영웅의 귀향은 완성되었는가.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은 그가 떠났던 날의 집이 아니다.
아내도 달라졌다.
아들도 달라졌다.
이타카도 달라졌다.
그리고 가장 많이 달라진 사람은 오디세우스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떤 장소로.
어떤 사람에게로.
어떤 시절로.
혹은 아직 상처받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에게로.
하지만 삶에는 돌아갈 수 있는 곳과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있다.
고향에는 돌아갈 수 있다.
집에도 돌아갈 수 있다.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떠나기 전의 자신에게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오디세우스가 마지막까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쟁 이전의 자기 자신에게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귀향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배는 항구에 닿았지만, 인간은 아직 바다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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