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

 

봄 하늘을 훔쳐간 구름이
어디선가 조리개를 열었다.
높새바람 따라
물줄기들이 사뿐히 쏟아진다.

삭정이 틈 사이,
겨울을 견딘 껍질이 슬며시 벌어지고
그 아래서 작은 신음이 움튼다.

풀빛 자벌레는
몸을 말고 있던 꿈을 펴며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하늘은
그 긴 사연들을
이 봄비에 실어 보내는 걸까.

계산되지 않은 계절의 방문,
갑작스러운 빗속에서
나는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 묻는다.
왜 하필 지금
내 마음을 건드리는 건지.

아아—
오늘은,
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관련글 보기

“실잠자리와 은빛 물고기 이야기”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에 대한 2개의 생각

  1. 시의 적절한 시여서 더욱 좋습니다. 봄비가 삼동을 견딘 삭정이 속 자벌레의 잠을 깨우고 시인의 감정선도 깨웠군요. 정월 개보름이었던 어제는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더니, 정월 대보름, 오늘은 날이 맑아 동네 정원을 돌아보니 꽃나무는 전쟁과 같은 무서운 인간사 아예 모르는 듯, 남 해할 뜻 전혀 없이 세상을 곱게 치장할 맘만으로 머잖아 개화 할, 산수유 망울만 부풀리어, 터질 듯 노오란 속 내 내어 비추고 있네요. 선생님 시의 속 자벌레처럼요. 봄비 한 번으로도 경물이 달라져서 세상은 꽃덤불. 벌, 나비 절로 날을 것인데, 인간사 언제면 시력을 회복하여 꽃의 마음을 온전히 알까 싶네요.

    응답
    • 울림님, 귀한 걸음과 더불어 시보다 더 시적인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는 정월 대보름의 비가 삭정이 속 자벌레를 깨우더니, 오늘은 대보름의 맑은 햇살이 산수유의 노란 속내를 비추고 있군요. 제가 시 속에서 우산을 접고 물었던 “왜 하필 지금 내 마음을 건드리는 건지”에 대한 해답을 님의 글에서 찾은 기분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계산과 갈등으로 소란스럽지만, 산수유 망울이 ‘남 해할 뜻 전혀 없이’ 제 몸을 부풀리는 그 순정한 의지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시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삭정이 사이에서 꿈을 펴는 자벌레처럼, 님께서 발견하신 그 ‘꽃의 마음’이 이 봄, 우리 모두의 메마른 감정선을 다시금 적셔주길 소망해 봅니다.

      봄비에 젖고 햇살에 물드는 이 계절, 님의 정원에도 산수유처럼 고운 소식들이 터져 나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따뜻한 공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응답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