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나무와 이별하듯이, 가을에는 나도 비워진다

베란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여름 내내 방 안을 맴돌던 더위는 어느새 물러나 있었다. 거실 한구석에는 선풍기만이 지난 계절을 붙잡고 있었다.
날개에 앉은 먼지를 닦고 선풍기를 창고에 넣었다. 밤마다 귀찮게 들리던 그 소리가 막상 사라지자 거실이 낯설게 조용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가을인데, 떠난 여름이 조금은 그리웠다.
선풍기가 놓여 있던 바닥에는 둥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걸레로 몇 번 문질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사라진 물건에도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한 계절이 머물다 간 자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사람은 때로 힘들었던 시간마저 그리워한다.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래 붙잡아 두는 것들이 있다. 내게는 게으른 습관과 미루어 둔 약속, 끝내 쓰지 못한 글들이 그랬다.
책상 위에는 몇 달째 덮어 둔 원고가 있었다.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다시 마주하기 싫어 내일로 미루었을 뿐이다. 그렇게 미룬 내일이 쌓여 어느덧 한 계절이 지났다.
가끔은 원고를 펼쳐 첫 문장만 읽고 덮었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오히려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완성하지 못할까 두려워 시작조차 미루는 일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며칠 뒤, 작은 배낭을 메고 가을 여행을 떠났다. 무엇을 찾겠다는 생각보다 잠시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수첩 한 권을 챙겼지만, 이번에는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도 하지 않았다.
산길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들이 가지에서 떨어졌다. 어떤 잎은 발치에 내려앉았고, 어떤 잎은 한참을 떠돌다가 흙 위에 몸을 눕혔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바스락거렸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아직 가지에 매달린 잎들이 보였다. 같은 나무에서도 먼저 떠나는 잎이 있고 끝까지 남는 잎이 있었다. 바람은 모두에게 불었지만 떠나는 때는 저마다 달랐다.
낙엽이 나무와 이별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무언가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러나 나무는 잎을 잃었다고 서둘러 빈자리를 채우지 않는다. 앙상한 가지 그대로 겨울을 맞는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동안 나는 비워진 자리를 견디지 못했다. 심심하면 텔레비전을 켰고, 외로우면 괜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정작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 뒤에 관계를 돌보는 수고를 피하려는 마음도 숨어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이 어색해졌다. 연락하지 못한 시간이 쌓이면 안부를 묻는 일조차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떠올려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산길을 내려와 작은 찻집에 들렀다. 창밖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잎은 거의 떨어졌지만 붉은 감 몇 알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차를 마시는데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생각나서.”
별다른 용건도 없는 전화였다. 나는 반가웠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친구가 나를 잊지 않은 동안,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조차 미루고 있었다.
친구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을 산길을 걷다가 찻집에 들어왔다고 했다. 친구는 잠시 웃더니 좋은 곳에 갔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 달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 누군가와 풍경을 나누고 싶어졌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다시 보았다. 잎을 떠나보낸 감나무에는 아직 열매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도 감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비워야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떠나보낼 것과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을 구별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제야 가을의 이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낙엽이 나무와 이별하듯이 내려놓아야 할 것도 있지만, 추운 계절에도 품고 가야 할 온기도 있다. 오래된 습관은 덜어내고, 소중한 인연은 더 가까이 두는 것. 내가 바라는 삶의 변화는 어쩌면 그처럼 소박한 일이었다.
찻집을 나서기 전, 친구에게 감나무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잠시 뒤 잘 익었다는 답장이 왔다. 짧은 말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창밖의 가을 풍경이 조금 더 가까워진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다고 오래된 습관을 모두 버릴 자신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먼 훗날의 새로운 삶보다 오늘의 작은 실천이 먼저였다.
집으로 돌아와 덮어 두었던 원고를 펼쳤다. 몇 줄을 고치고 다른 친구에게도 짧은 안부를 보냈다. 그것만으로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일이면 다시 게으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미루지 않았다.
창밖에서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떠나는 잎을 붙잡지도, 남은 잎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가을의 비움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더는 나를 자라게 하지 못하는 것을 내려놓고, 여전히 삶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소중히 지키는 일이었다. 그 차이를 알아가는 데 나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풍기를 치운 거실 바닥에는 늦가을 햇살이 길게 누워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둥근 자국도 햇빛 속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는 그 빈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
*관련글 보기
강화 연미정, 제비꼬리 물길에 걸린 시간의 풍경|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북녘
시흥 관곡지 연꽃, 비 오는 연밭에서 어머니의 태몽을 떠올리다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