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오랫동안 무협소설과 무협영화를 좋아했다. 무협을 좋아하는 이유를 돌아보면, 그 안에는 정의에 대한 바람과 인생을 바꾸는 기연, 끝까지 지키고 싶은 의리가 있었다.
검 한 자루를 등에 지고 강호를 떠도는 협객이 좋았다.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않고,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으며, 원수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검을 뽑는 사람이 좋았다.
젊었을 때는 그들의 무공이 부러웠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세무공. 수십 명에게 포위되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바람처럼 담장을 넘는 경공과 사람을 몇 장 밖으로 날려 보내는 장풍.
그때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 달라졌다.
이제 무협을 보면 무공보다 사람이 먼저 보인다.
강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보이고, 천하제일의 검객보다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나는 무협을 좋아하면서도 오랫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몰랐는지도 모른다.
무협에는 오래된 공식이 있다.
악인의 손에 부모를 잃고 어린 주인공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소년은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다 깊은 산속에서 은둔고수를 만난다. 아무도 찾지 못한 동굴에서 오래된 비급을 발견하기도 한다.
평범했던 소년은 절세무공을 익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배신과 죽음의 위기를 넘는다.
마침내 원수와 마주한다.
그리고 오래된 원한을 끝낸다.
너무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말까지 짐작하면서도 다시 읽는다.
왜 그럴까.
무협에는 현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악행에는 대가가 따른다.
은혜는 갚아야 한다.
약속에는 무게가 있다.
의리를 저버린 사람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른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찾아온다.
이것이 무협의 오래된 권선징악이다.
물론 좋은 무협은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누지만은 않는다.
정파라고 모두 정의롭지 않다. 사파라고 모두 악하지도 않다.
명문정파의 장문인이 권력과 명예에 취하고, 세상이 악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오히려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그래도 무협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 하나가 있다.
잘못된 것은 언젠가 바로잡혀야 한다는 믿음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이 반드시 이기지는 않는다.
악한 사람이 언제나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오래 노력했다고 반드시 성공하지 않으며, 진심을 다했다고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한다고 사랑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보다 무협에서 정의를 더 자주 만난다.
무협의 권선징악이 때로는 유치하게 보이면서도 수백 년 된 이야기처럼 되풀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평한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무협에는 또 하나 재미있는 법칙이 있다.
새로운 것보다 오래된 것이 강하다.
현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한다.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기술을 밀어내고, 새로운 지식이 과거의 오류를 수정한다.
무협은 정반대다.
어제 만들어진 무공보다 백 년 전의 무공이 강하다.
백 년 된 무공보다 천 년 전에 사라진 절세신공이 더 강하다.
낡은 비급 한 권을 차지하기 위해 강호 전체가 피를 흘린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동굴 벽에 새겨진 몇 줄의 구결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산속에서 약초나 캐던 초라한 백발노인이 알고 보면 수십 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절대고수다.
무협에서 오래되었다는 것은 낡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된 것은 잃어버린 완전함을 뜻한다.
지금의 강호는 타락했지만 옛날에는 진정한 협객이 있었다.
지금의 무공은 불완전하지만 사라진 비급에는 완전한 무학이 남아 있다.
그래서 무협의 주인공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답을 찾는다.
현실은 미래를 숭배하지만 무협은 과거를 숭배한다.
나는 이것이 무협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것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찾는 마음도 무협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무협의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기연이 찾아온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죽지 않는다.
절벽 아래에서 천하제일의 비급을 발견한다.
독을 먹었는데 목숨을 잃기는커녕 막혀 있던 혈도가 뚫린다.
우연히 먹은 영약으로 수십 년의 내공을 얻기도 한다.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은둔고수가 나타난다.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런 우연을 쉽게 받아들인다.
마음속으로는 우리도 기연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평범한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사람.
한 번의 만남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스승.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에게 마침내 찾아오는 기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간이 어느 날 빛을 보는 순간.
무협의 비급과 기연은 결국 인생의 반전을 바라는 인간의 소망이다.
그러나 현실의 절벽 아래에는 비급이 없다.
떨어지면 다친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우리를 구해 주지도 않는다.
수십 년의 내공을 한순간에 전해 주는 스승도 없다.
나이가 들수록 그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우리가 동경했던 무공 역시 현실 앞에서는 허망해질 때가 있다.
신비한 무공과 초인적인 힘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실제 격투의 세계에서 제대로 훈련된 격투가에게 힘없이 무너지는 장면을 볼 때가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현실에는 절세무공이 없다.
장풍은 불지 않는다.
경공으로 허공을 달릴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무협의 패배가 아니다.
애초에 무협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현실의 무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협은 인간의 소망을 무공이라는 언어로 표현한 이야기다.
힘없는 사람이 강해지고 싶다는 소망.
빼앗긴 사람이 자신의 것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한이 언젠가는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
악을 행한 사람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는 소망.
그리고 세상이 모두 등을 돌려도 단 한 사람만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 주기를 바라는 소망.
그 소망들이 검과 비급과 복수라는 모습으로 강호를 떠돌고 있다.
젊었을 때 나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동경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세상을 살아보니 사람을 쓰러뜨리는 무공보다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강한 적과 싸우는 것보다 자신의 욕심을 이기는 일이 더 어려웠다.
받은 은혜를 오래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약속을 지키는 것도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 곁을 오래 지키는 것 역시 절세무공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무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니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무협을 읽으면서 무공보다 의리를 본다.
검보다 사람을 본다.
승리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를 본다.
좋은 무협의 주인공은 단순히 강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천하제일인은 협객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지 않더라도 약한 사람 앞에서 검을 거두고, 강한 악인 앞에서 검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이 협객이다.
무협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무공의 높이가 아니라 검의 방향이다.
생각해 보면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장풍은 없지만 힘은 있다.
돈이 힘이 될 수도 있고, 지위가 힘이 될 수도 있다.
지식과 경험도 힘이다.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느냐가 아니다.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하는가이다.
그래서 무협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경공과 장풍은 허구지만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현실적이다.
복수와 비급은 허구지만 억울함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현실적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이상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그런 사랑을 바라는 마음은 현실적이다.
무협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현실에서 부족한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무협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제 나는 절벽 아래에 비급이 없다는 것을 안다.
위기의 순간에 은둔고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스스로 내공을 쌓아야 한다.
하루하루 버티며 쌓은 경험이 내공이 된다.
실패에서 배운 것이 초식이 된다.
수없이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난 시간이 자신만의 비급이 된다.
젊었을 때는 누군가에게 절세무공을 전수받고 싶었다.
지금은 안다.
현실에서 진짜 내공은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면서 쌓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무협이 더 좋아지는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 읽었던 무협과 지금 읽는 무협은 같은 이야기인데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때는 주인공이 얼마나 강해질지가 궁금했다.
지금은 그 힘을 얻은 뒤 어떤 사람이 되는지가 궁금하다.
그때는 복수가 통쾌했다.
지금은 복수가 끝난 뒤에도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때는 절세무공을 가진 사람이 부러웠다.
지금은 평생 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인다.
무협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 장풍을 믿지 않는다.
경공도 믿지 않는다.
천 년 된 비급 한 권이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 오래된 무협소설을 펼친다.
검객 한 사람이 석양을 등지고 먼 길을 떠나는 장면을 만나면 여전히 마음이 움직인다.
그 사람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그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지 않는 것.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함부로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오래 지키는 것.
그리고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너무 쉽게 버리지 않는 것.
그런 삶이야말로 현실에서 익혀야 할 가장 어려운 무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무협을 좋아한다. 이제 내가 무협을 좋아하는 이유는 강한 무공보다 끝내 버리지 않는 마음에 있다.
무협이 현실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협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정의가 언제나 승리하지 않는다.
악인이 반드시 벌을 받지도 않는다.
오래 견뎠다고 기연이 찾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사람은 정의가 이기기를 바란다.
약한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사랑이 쉽게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협은 바로 그 오래된 바람을 버리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강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강호는 중국의 어느 깊은 산속에도 없고, 오래된 지도에도 없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
살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몇 번쯤 자신의 강호를 건넌다.
누군가는 배신을 만나고, 누군가는 패배를 겪는다.
때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기연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현실의 절벽 아래에는 비급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어느 노고수가 전해준 절세무공이 아니다.
살면서 쌓은 내공이다.
견딘 시간이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끝내 버리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다.
어쩌면 내가 평생 무협에서 찾고 있었던 것도 천하제일의 무공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검을 든 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의 잘못된 것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
아무리 약했던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자기 힘으로 일어서 자신의 검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강호를 그토록 오래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책을 덮으면 강호는 사라진다.
절세무공도 사라지고, 비급도 사라지고, 검객도 사라진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작은 검 한 자루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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