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에서 만난 외로움과 마음의 비움|가는 길마다 꿈결이다

가는 길마다 꿈결이다

 

저녁 어스름에 공원을 걷는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남아 있다. 하루가 제 몸을 다 태우고 남긴 온기 같다. 나무들은 빛을 거두며 조금씩 제 이름을 잃어간다.

혼자 걷는다.

마른 잎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멀리 자동차 소리가 밀려왔다 사라진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다.

세상은 어두워질수록 귀를 연다.

산책로 옆 빈 벤치에 종이컵 하나가 놓여 있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다. 사람은 떠났는데 그가 버린 것은 한동안 남아 저녁을 맞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흔적으로 남아 있을까.

생각 하나가 따라붙는다.

오늘따라 외롭다.

젊은 날에는 외로우면 사람을 찾았다. 전화를 걸고 약속을 만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무엇으로든 빈 곳을 채웠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외로움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외로움은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생각할 때 생기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누구에게 잊혔는지 오래 들여다볼수록 ‘나’는 커진다.

나로 가득 찬 마음에는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나는 외로움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냥 걷는다.

맞은편에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천천히 가.”

뒤따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웃으며 나를 지나친다. 가로등 아래 두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진다.

나도 한때 누군가를 따라 걷던 사람이었다.

또 한때는 누군가가 나를 따라왔다.

지금은 혼자 걷는다.

그러나 지나간 사람들을 불러 세우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떠날 권리가 있고 기억에게도 저물 시간이 있다.

다시 걷는다.

생각들이 따라온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 끝난 관계. 아직 오지 않은 내일.

혼자 걸으면서도 마음이 시끄러운 것은 내 안에 너무 많은 ‘나’가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후회하는 나.

그리워하는 나.

두려워하는 나.

나는 그들을 내쫓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게 둔다.

그러자 생각 사이로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가의 은행잎 한 장.

갈라진 나무껍질.

가로등을 맴도는 작은 날벌레.

평소에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이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나무를 보면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늘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가도 붙잡지 않는다.

나무는 서 있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간다.

생각이 없으니 만물이 그대로 존재한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다.

나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 나의 외로움도 함께 사라진다.

나 여기 없으니 너도 거기 없다.

‘나’가 작아지자 ‘너’의 빈자리도 작아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로 저녁이 들어온다.

나무가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온다. 자동차 소리와 풀벌레 울음이 들어온다.

비워진 마음은 빈 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다른 것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였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다.

빛은 먼 곳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걸어갈 몇 걸음만 밝혀준다.

삶도 그랬다.

나는 보이지 않는 먼 길 때문에 오래 불안해했지만, 정작 살아온 것은 언제나 한 걸음씩이었다.

한 걸음이면 한 걸음의 빛이면 된다.

나는 걷는다.

앞으로 가면 길이 나타나고, 지나가면 길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돌아보니 조금 전의 벤치도, 종이컵도, 아이와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의 나도 없다.

저녁은 어느새 밤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마음을 비우려 하지 않는다.

비우려는 마음 또한 마음이 만든 소란일 테니.

그냥 둔다.

그리고 걷는다.

길은 발밑에서 잠시 생겼다가 사라진다.

가는 길마다 꿈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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