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을 수 있는 동안|늙어가는 부부의 사랑과 유한한 삶

 

영화 《트로이》를 다시 본 것은 바람의 결이 달라지던 가을 초입이었다.

스크린 속 아킬레우스가 포로로 잡혀온 여인에게 말했다.

“신들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죽거든. 그렇기에 인간의 모든 순간은 아름답지.”

젊었을 때는 그 말이 영웅의 허세처럼 들렸다. 죽음은 늘 남의 일이었고, 삶은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았다.

요즘은 다르다.

그 문장이 가끔 서늘하게 가슴에 걸린다. 죽음 때문에 삶이 아름답다는 말은 축복일까. 아니면 돌아갈 길이 줄어든 사람들이 겨우 찾아낸 위안일까.

얼마 전 아내와 소래산 자락을 걸었다.

낮게 깔린 흙냄새 사이로 이른 낙엽이 밟혔다. 앞서 걷는 아내를 바라보다 문득 발걸음이 느려졌다.

비스듬한 햇살 아래 아내의 머리카락 몇 올이 하얗게 빛났다.

언제 저렇게 희어졌을까.

매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나는 아내에게서 빠져나가는 시간을 보지 못했다.

세월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어느 날 거울 속 얼굴에 주름 하나를 놓고,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흰 머리카락 몇 올을 얹어놓는다. 그리고 모르는 척 지나간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왜 갑자기 손을 잡아?”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냥.”

사실은 그냥이 아니었다.

살집이 내리고 마디가 굵어진 손이었다.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였다.

이 손을 잡을 수 있는 날도 무한하지 않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그날따라 선명했다.

상실이 아픈 것은 그 자리에 한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저녁, 창가에 앉았다.

노을이 아파트 외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볕 한 조각이 마루 위에 길게 누웠다가 조금씩 얇아졌다.

나는 물잔을 들다가 내려놓았다.

잔 가장자리로 붉은 볕이 엎질러졌다.

잠시 뒤 그 빛은 문턱까지 밀려갔다가 사라졌다.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볕은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식탁에 앉고, 같은 산길을 걷고, 같은 사람의 손을 잡아도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우리가 아니다.

어둠이 내려앉자 베란다 유리창에 아내와 내 모습이 희미하게 겹쳤다.

문득 아킬레우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신들이 인간을 질투한다면 인간이 죽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끝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한다.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함께 걷고, 사라질 온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내민다.

어쩌면 신들이 갖지 못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런 다급한 다정함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밤 아내의 손을 한 번 더 고쳐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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