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를 돌면|인생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새로운 삶

모퉁이를 돌면

어느덧 지나온 길이 길어졌다.

돌아보면 내 삶은 한 번도 곧은길이 아니었다. 수없이 꺾이고 휘어졌고, 때로는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오래 서성이기도 했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상하리만큼 모퉁이를 좋아했다.

학교를 오가는 골목길에서 모퉁이를 만나면 까닭 없이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모퉁이를 돌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한 소녀를 상상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소녀가 우연처럼 모퉁이 너머에서 걸어오고 있을 것 같았다.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순간이 정말 찾아올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어쩌다 또래 여학생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괜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몇 걸음 뒤에서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러면서 다음 모퉁이를 만나면 또 기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수줍고도 맑았던 시절이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믿는다.

나 역시 그랬다.

모퉁이 너머에는 사랑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될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길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사랑도 있었고 희망도 있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미래도 그곳에 있었다.

곧은길은 멀리까지 보인다.

그러나 모퉁이는 다음 풍경을 감춘다.

사람은 보이는 길에서는 걸어가지만,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는 꿈을 꾼다.

그 소년이 자라 교사가 되었다.

칠판 앞에서 학생들에게 세상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내 삶의 다음 모퉁이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떤 말은 아이의 마음에 닿았고, 어떤 말은 허공에서 사라졌다. 옳다고 믿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살아가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기쁨이 기다리는 모퉁이가 있었고, 차마 돌아서고 싶지 않은 모퉁이도 있었다.

사람을 만났고 사람과 헤어졌다.

무엇인가를 얻었고, 오래 붙들었던 것을 놓아야 했다.

그때마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뒤 돌아보니 끝이라고 여겼던 자리 대부분은 끝이 아니었다.

모퉁이였다.

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사실은 언제나 지나온 뒤에야 알았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일도 하루를 견디고 다시 하루를 걷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뒤에 놓여 있었다.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거리가 생겼다.

가까이 있을 때는 절벽이었던 것이 멀어지고 나면 하나의 산자락이 되었다.

삶의 모퉁이는 고통을 없애주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자리를 바꾸어주는 곳이었다.

소년 시절의 나는 모퉁이 앞에서 물었다.

‘무엇이 있을까.’

그 물음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무엇이 있든 만나보자.’

기쁨이면 기쁨대로 만나고, 쓸쓸함이면 쓸쓸함대로 지나가면 된다.

좋은 날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힘든 날도 영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이를 걸어 여기까지 왔다.

칠판에 수없이 쓰고 지우던 시간도 이제는 오래전 풍경이 되었다.

그런데도 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만나면 가끔 그 시절의 소년이 돌아온다.

걸음이 조금 느려진다.

물론 이제 모퉁이 너머에서 마음속으로 그리던 소녀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낡은 담장에 저녁 햇살이 내려앉아 있을 수도 있다.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을 수도 있고, 이름 모를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집에서 저녁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소년 시절에는 모퉁이 너머에서 특별한 삶을 기다렸다.

이제는 평범한 풍경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안다.

기대가 작아진 것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한때는 모퉁이를 돌면 마음속으로 그리던 소녀를 만날 것이라 믿었다.

이제는 저녁노을 하나만 만나도 좋다.

바람 한 줄기면 또 어떤가.

사람은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인생의 모퉁이는 길의 끝이 아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길이 시작되는 자리다.

내 삶에 앞으로 몇 번의 모퉁이가 남아 있는지는 모른다.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수많은 모퉁이를 돌아 여기까지 왔다.

길이 꺾였다고 해서 삶까지 꺾이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얼마쯤 가자 오래된 담장이 끝나고 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늦춘다.

아주 오래전, 책가방을 메고 이 길을 걷던 소년처럼.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선다.

기다리던 소녀는 없다.

낮은 담장 위로 저녁 햇살이 길게 누워 있다.

어디선가 밥 짓는 냄새가 난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간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

문득 그 옛날의 소년이 생각난다.

그 아이는 평생 얼마나 많은 것을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모퉁이 너머를 궁금해했다.

나는 그 아이가 걸어온 먼 길의 끝에 서서 다시 한 번 모퉁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상하게도,

아직 조금 설렌다.

 

*관련글 보기

프라이팬|주방에 남은 열과 침묵을 그린 현대시

조용한 삶이 주는 위로: 이름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들꽃 같은 인생의 의미

낙엽에서 시작된 변화: 봄을 먼저 사는 사람의 수필 (시흥 산책로에서 발견한 성장의 의미)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선비천사 브런치 바로가기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댓글 남기기